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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유하연은 지금까지 견지해 왔던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은 느낌에 아랫입술이 찢어지도록 꽉 깨물었다. “잘못했어요. 엄마.” 결국 유하연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채린이한테 사과할게요.” 김희영이 멈칫하더니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잘못한 거 알았으면 됐어. 밖에 추우니까 얼른 들어와.” 김희영도 밖이 얼마나 추운지 알고 있었다. 유하연은 서러움을 꾹꾹 참으며 거실로 들어가 유채린의 오만한 눈빛을 마주하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 “기고만장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갑자기 꼬리를 내린 거야?” 유채린이 우쭐거리며 유도경의 팔짱을 끼더니 유하연을 비웃었다. “오빠가 오니까 졸리긴 한가 보지?” 유채린은 유하연이 유도경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도경이 편을 들어주는 한 유하연은 영원히 허리를 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유하연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자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부채형 그림자를 만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유채린은 유하연이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계속 비아냥댔다. “유하연, 이렇게 유연한 사람인지 몰랐네?” 유하연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해봤자 고작 모욕인데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유하연에게 유채린의 모욕보다 더 무서운 건 유도경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유하연은 너무 보잘것없었고 오랜 시간 밖에 서 있은 덕분에 입술도 파리해져 있었다. 이에 마음이 약해진 김희영이 유채린을 말렸다. “하연이도 사과했으니까 채린이 너도 그만 해. 시간도 늦었고 무슨 일 있으면 내일 얘기하자. 일단 들어가서 쉬어.” 김희영이 하인에게 지시했다. “대추차 좀 끓여서 하연이 가져다줘요...” “엄마.” 유채린은 유하연을 챙기는 김희영을 보며 화가 치밀어올라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유하연을 노려봤다. “난 몰라요. 유하연 당장 경진시에서 쫓아내요.” “나랑 사주가 맞는지는 일단 둘째 치고 유하연이 경진시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요. 저년이 얼마나 비겁한지 알아요? 아직도 윤재 씨 잊지 못해서 주변을 얼쩡거린다고요. 그런데 경진시에 계속 남겨두면 앞으로 어떻게 윤재 씨에게 들러붙을지 몰라요.” “아니. 절대 그럴 일 없어.” 유하연은 유채린이 왜 이 정도로 그녀를 경계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바로 부정했다. 심윤재와 이미 연을 끊은 상태라 전혀 연락이 없을뿐더러 그는 이제 유하연과는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유채린은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초췌하기 그지없지만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너무 가여워 보여 유채린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래. 그런 표정으로 남자 꼬시고 다녔지? 태어나길 발랑 까져가지고. 여우 같은 년.” “채린아, 하연이는...” 김희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유하연의 편을 들어주려 했다. 같이 지낸 세월이 있었기에 김희영은 유하연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채린은 김희영이 유하연을 도우려 하자 더 화가 치밀어올라 눈시울까지 빨개졌다. “윤재 씨 꼬시려고 저런다니까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병원까지 따라간 걸 보면 모르겠어요?” 유채린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김희영은 유하연의 편을 들어주려던 걸 포기하고 얼른 유채린을 달랬다. “그래. 엄마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응? 임신 중인데 그러다 몸 상하면 어떡해. 네 말이 다 맞으니까 진정해. 착하지...” 유채린도 화를 내느라 몸이 불편했는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 유하연은 유도경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본가에서 지내던 방으로 올라갔다. 예전에는 저택 3층의 빛이 잘 들어오는 방에 살고 있었지만 유채린이 온 뒤로 2층의 쪽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 다용도실이 있었기에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건 물론이고 도우미들이 잡다한 물건을 그녀의 방이나 문 앞에 쌓아두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유하연은 본가로 돌아오는 일이 거의 드물었기에 개인물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문 앞에 쌓아둔 물품을 옮긴 유하연이 방으로 들어가 보니 곰팡이가 냄새가 확 풍겨왔고 바닥에는 뭔지 모를 물건들이 널브러져 누워서 쉬기는커녕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도우미들은 유채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김희영 몰래 유하연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김희영이 가끔 발견한다 해도 고작 유채린에게 잔소리하는 것으로 끝냈다. 유하연은 방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시간이 되자 김희영의 방으로 향했다. 김희영은 11시에 취침했기에 10시 반이면 무조건 방으로 돌아간다는 걸 유하연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을 두드려보니 김희영이 방에 있었다. “하연아.” 김희영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유하연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유하연의 손을 잡은 김희영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화들짝 놀랐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지 그러니. 몸도 안 좋은데 감기라도 걸리면 너만 힘들잖아.” 유하연이 입꼬리를 당기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방이 그 모양인데 샤워는 어떻게 하고 옷은 어떻게 갈아입으라는 건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김희영이 옷장에 준비해 둔 옷들은 유채린이 가위로 갈기갈기 찢어놓아 걸레가 된 지 오래였다. 김희영에게 말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차라리 김희영이 골머리를 앓지 않게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는 김희영의 손을 맞잡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제발 부탁인데 나 경진시에서 쫓아내지 마요. 네?” 유도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오랫동안 노력했고 이제 교수님의 연락만 기다리면 되는데 지금 떠날 수는 없었다. “그건...” 김희영이 난감한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하연과의 사주가 상극이라는 유채린의 말을 믿고 유하연이 정말 유채린에게 해가 될까 봐 걱정했다. 그때 유하연이 눈을 질끈 감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김희영이 얼른 유하연을 부축하려 했지만 유하연은 무슨 말을 해도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엄마, 나 정말 경진시에서 쫓겨나면 안 돼요. 엄마...” 유하연이 고개를 들어 김희영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뜨거운 눈물이 마르지만 매끈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자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유하연의 울음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려고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유채린과 달랐다. 조용했지만 서러움에 찬 울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찡하게 만들었다. “그래.” 김희영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쪼그리고 앉아 깡마른 유하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이고, 착한 우리 하연이. 울지마. 엄마가 약속할게.” 유하연이 눈을 감고 머리를 김희영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줄 끊어진 듯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는데 김희영이 유하연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주가 상극이라면 앞으로 적게 만나면 돼.” 쾅. 김희영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채린이 손에 들었던 우유 잔을 깨트렸고 큰 소동에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엄마, 유하연이 엄마 찾아가서 뭐라 했어요? 그래, 네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지.” 화가 잔뜩 치밀어오른 유채린은 얼굴을 붉히며 테이블에 놓인 빵 쪼가리를 유하연에게 던지자 유하연이 몸을 살짝 돌려 피했지만 빵에 발려진 잼이 옷에 흩뿌려지고 말았다. 유하연이 창백한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 없이 티슈를 몇 장 꺼내서 닦았다. 김희영은 그런 흥분한 유채린을 말리며 한참 다독였고 결국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 겨우 화를 삭혔인 듯 보였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김희영에게 일러바쳐다. “엄마, 저 얼굴에 속지 마요.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좋은 사람 아니니까.” “저번에 산부인과 검사받으러 갔다가 유하연을 마주쳤어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뱄을지 누가 알아요. 다른 사람이 알면 우리 집을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헛소리하지 마. 하연이는 그런 짓할 사람이 아니야.” 김희영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하연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건강 검진할 때가 됐는데 하연이 너도 우리랑 함께 병원에 다녀오자.” 유하연은 의심을 받자 가슴이 철렁했다. 옆에 앉은 유도경이 대수롭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유하연을 힐끔 쳐다봤지만 유하연은 칼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느낌에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자칫하다 검사라도 받는 날엔 모든 게 들통나겠지만 유하연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유하연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자연스러운지 생각하며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임신은 절대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조용히 식사하던 유도경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며칠 뒤면 배호진 선생님이 올 텐데 그때 같이 검사하면 되죠.” 산부인과의 신으로 불리는 배호진에게 검사받는 게 확실히 더 나은 것 같아 김희영도 별다른 의견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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