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병원 가서 검사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김희영은 유하연을 본가에 남겼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질러진 방을 보자 짜증이 치밀어올라 도우미를 불러 청소하게 했다. 대충하고 말려는 하인을 보며 유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채린에게 잘 보이려고 일자리까지 걷어찰 셈이에요? 엄마 불러오면 유채린은 멀쩡하겠지만 두 사람은 여기서 쫓겨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깜짝 놀란 도우미들이 전전긍긍하며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유하연은 하나밖에 없는 창문을 열고 환기하며 강아람에게 전화를 걸어 유도경이 곧 배호진을 데려올 것이라고 알렸다.
“아람아, 배 선생님께 보이면 나 뽀록나겠지?”
유하연의 마음은 초조함보다 두려움이 더 많았기에 이빨 자국이 남는 줄도 모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임신한 사실을 절대 유도경에게 들켜서는 안 돼. 지금 바로 중절 수술해야 해.”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면서 많은 피를 흘렸으니 아이가 무조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생명력은 유하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고 아직도 유하연의 뱃속에서 멀쩡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강아람에게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유하연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 아이는 지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중절수술 날짜는 최대한 빨리 잡아줄게.”
강아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귀띔했다.
“하지만 배 선생님이라면 아이를 지웠다 해도 검사만 하면 수술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더...”
유하연은 갑작스러운 오한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덕분에 깨물던 입술이 찢어지면서 피가 새어 나왔다.
‘내가 지운 아이의 아빠가 자신이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일까?’
유하연은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남자에 대해 유하연이 짐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유도경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유하연이 제멋대로 내린 결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긴, 소유욕에 사로잡힌 사이코패스가 장난감의 반격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 그럼 어떡하지...”
조급해진 유하연이 크지 않은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하연이 강아람에게 물었다.
“배 선생님을 회유하는 건 어때? 지금까지 모은 돈을 합치면 꽤 되는데.”
유하연은 유씨 가문에 오래 있기도 했고 향락에 빠져 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들으면 놀랄 정도의 돈이 계좌에 들어있었다.
“내가 노력해 볼게.”
지금으로써는 최선이었기에 강아람이 수락했다. 강아람은 한번 결정한 일을 빠르게 밀고 나가는 행동파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의 인맥을 이용해 중절 수술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고 모든 수속을 마친 뒤 유하연에게 전화해 이틀 후 수술하러 오라고 말했다.
유하연도 그제야 한시름 놓고 수술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유씨 가문에서 버텼다. 유채린은 집에 갇혀있는 유하연이 더는 심윤재에게 꼬리를 칠 수 없다고 생각해 기분이 좋아졌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심윤재를 만나러 나가느라 유하연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유하연과 유채린이 부딪히는 걸 줄이기 위해 도우미에게 식사를 방에 올려다 주라고 한 김희영 덕분에 유하연은 오랜만에 조용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틀 뒤 집에서 나가려 하니 쉽지 않았다. 도우미를 통해 볼 일이 있으니 나가게 해달라고 김희영에게 전달했지만 김희영이 직접 찾아와 거절했다.
“하연아,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요 며칠은 일단 집에서 푹 쉬다가 배 선생님 오시면 그때 전면 검사 받아. 검사받고 나서 아무 문제 없으면 더는 못 나가게 막지 않을게.”
“하지만 엄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유하연이 다급하게 김희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아니면 나도 이때 나가겠다고 하지는 않았겠죠.”
“무슨 일인데?”
김희영은 다급해하는 유하연을 보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미안해요. 엄마.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에 김희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래도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어. 놀기 좋아하고 몸 간수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새 네가 몰라보게 변한 것 같아.”
“하연아, 일이야 어떻게 됐든 네가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네가 나쁜 물이 들지는 말았으면 좋겠구나.”
유하연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를 나쁜 물에 들게 한 사람이 엄마 아들이라면 어떡할 거예요?’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엄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김희영이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정말 임신한 게 아니라면 뭐가 무서워서 그래. 배 선생님께 검사받고 몸조리 잘하면 되지.”
“하지만...”
유하연이 다시 한번 타일러보려는데 누군가 괴력으로 힘껏 밀어버렸고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유하연이 뒷걸음질 치다가 벽을 짚으며 간신히 넘어질 위기를 피했다.
“하지만 뭐.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유채린이 언제 나타났는지 김희영 앞을 막아서서는 유하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모를 줄 알고? 요새 나랑 윤재 씨 사이가 좋아지니까 불안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왜? 나가서 윤재 씨 꼬시기라도 하게? 꿈도 꾸지 마.”
이 말에 유하연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심윤재를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지 의문이었다.
“이 세상에 남자가 심윤재밖에 없는 줄 알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유하연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가 사는 그 세상에는 심윤재밖에 없어? 심윤재를 제외한 다른 일은 없는 거냐고?”
“나는 연애만 하면 세상이 온통 남자밖에 없는 너랑은 달라.”
유하연이 비꼬자 화가 치밀어오른 유채린이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너 윤재 씨한테 미련 남은 거 맞잖아. 아니면 왜 나가서 무슨 짓 하는지 말을 못 해?”
두 사람이 다투는 걸 듣다가 진절머리가 난 김희영이 하인에게 유하연을 방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하연아, 며칠 안 남았으니까 일단 잠자코 집에 있어.”
그러더니 유하연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유채린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유채린은 유하연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지만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는 않았다. 유하연과 싸우면 늘 말발이 딸려 약만 잔뜩 오른 채 끝나고 말았다.
다시 방에 갇힌 유하연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는데 강아람이 전화를 걸어와 왜 아직도 병원에 도착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수술 시간 잡았고 의사들도 준비를 마친 상태야. 네가 와서 검사만 하면 시작할 수 있어.”
유하연은 너무 조급한 나머지 머리를 잡아 뜯었다.
“잠깐만 더 기다려줘. 금방 도착할게.”
방법을 찾던 유하연이 침대맡에 놓인 서랍장에 유도경이 준 서류가 있던 게 떠올라 얼른 김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도경에게 서류를 가져다줘야 한다는 유하연의 말에 김희영이 의심을 감추지 못했지만 서류를 확인하고는 의심이 거의 사그라들었다.
“운전기사 붙여줄게.”
유하연은 김희영이 운전기사를 붙여 감시하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는 사단을 만들기 싫어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