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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장

“됐어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랑 아진이가 할 얘기가 있어서요.” 어머니를 침대 옆에 앉히고 나는 시선을 옆에 서 있는 김아진에게로 돌렸다. “잠깐 밖으로 나갈까?” 계단 쪽으로 그녀와 함께 걸어가며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얼굴에 비장한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그동안 우리 어머니를 돌봐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그때 어머니 병원도 찾아줘서 정말 감사해.” “하지만 지금은 감정 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어. 넌 좋은 사람이야. 앞길도 밝을 거고. 더 이상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김아진은 입술을 꼭 다물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어.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야.” “정말 나한테 고마운 거라면 나한테 마음을 좀 줄래?” 그녀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며 나는 김아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말했어. 미안해.” 내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알았는지 그녀의 눈가가 순식간에 촉촉해졌다. 코를 훌쩍이며 김아진은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네 마음 이해해.” 그 말을 끝으로 김아진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돌아서서 떠났다. 다시 병실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김아진이 함께 오지 않은 걸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진이는? 왜 같이 안 들어왔니?”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요.”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말했다. “어머니, 이제 더 이상 저랑 아진이 억지로 이어주려 하지 마세요. 저도 이미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저희는 그냥 친구 사이예요.” 하지만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살짝 때렸다. “이 녀석아, 아진이 같은 좋은 여자를 몰라보다니. 네가 거절한 거지?” 그러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가 아직도 시아를 잊지 못하는 건 알지만 다 지난 일이야. 빨리 잊고 박씨 가문과의 원한도 털어버리고 이제는 제대로 살아야지.” “네 아버지도 네가 매일 그런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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