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집에 도착해 씻고 나니 때마침 침대 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해외에 있는 박지연이 걸려온 전화였는데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었다.
“아가야, 엄마가 네가 파키슨 대학에 답장한 메일을 봤어. 너 정말 A국에 공부하러 올 거야?”
유지민은 고개를 떨구고 쓸쓸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렸어?”
박지연은 그녀가 기분이 나쁜 것을 발견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유지민은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기쁜 척 말했다.
“일이 있긴 하지만 좋은 일이에요. 작은 삼촌이 곧 결혼해요. 그럼 할머니도 앞으로 함께 해줄 사람이 있으니 제가 굳이 여기에 머물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서요. 차라리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게 더 낫겠어요. 그러면 아빠 엄마와도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너무 잘됐네! 그럼 아빠 엄마가 널 데리러 국내로 돌아갈까?”
박지연은 흥분해서 말했다.
유지민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박지연이 서둘러 말했다.
“그때 우리가 사업이 바빠서 서둘러 외국에 가야 했지만 넌 너무 어려서 이민 절차를 제대로 밟을 수 없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프지만 널 국내에 남겨두었는데 마침 강씨 가문의 할머니가 널 받아주셨어. 그러지 않으면 난 계속 눈물만 흘렸을 거야. 돌아가서 어르신께 고맙다고 인사해야겠어.”
유지민은 어쩔 수 없이 그저 알았다고 말했고 박지연은 몇 마디 당부를 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유지민은 창가에 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주차 자리가 텅 비어 있는걸 보아 강시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원래 강씨 가문의 조카가 아니니 강시현은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주며 편애를 줄 수 있지만 또 언제든지 거둬들일 수도 있었다.
이런 사랑 때문에 그녀는 강시현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로 착각했고, 어렸고 어리석었던 그녀가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했다.
몇 년 전 어느 깊은 밤, 알코올에 젖은 그녀는 흐리멍덩해서 강시현의 침대에 올라가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심지어 강제로 키스했다. 그러나 깨어 있던 강시현은 그녀를 힘껏 밀쳐버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지금도 유지민은 강시현이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경악스럽고 실망했으며 냉혹하고 잔인했을뿐더러... 심지어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날 밤은 마치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강처럼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강시현은 마치 눈으로 뒤덮인 설산처럼 차가운 냉기를 뿜고 있어 유지민은 한 걸음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걱정이 태산 같았던 그녀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쉬려고 했지만 악몽 속에서 허덕이며 잘 자지 못했다. 다시 깨어나 보니 오후 2시가 되었다.
유지민은 세수를 한 후 간단히 점심을 먹고는 곧 할머니 보러 갔다.
정원을 지나던 그녀는 텅 빈 주차 자리를 보며 강시현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키슨 대학교 입학 절차가 끝나면 강시현은 소원을을 이룰 수 있고 더는 그녀를 피하려고 집에 돌아오지 않을 필요가 없다.
전미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조용한 환경에서 휴식해야 하다 보니 혼자 별원에 살고 있었다. 유지민은 틈만 나면 그녀를 보러 가곤 했다.
별원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안에서 전미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멍청해!”
전미자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훈계했다.
“이 늙은이는 평생 많은 사람을 봐왔어. 양민하가 왜 이혼했고 왜 또 네 곁에 돌아와 기웃거리는지 넌 몰라도 난 똑똑히 보아낼 수 있어!”
강시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서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전미자는 의미심장하게 타일렀다.
“시현아, 큰일은 자세히 보고 사업은 신속히 처리하는데 왜 사랑 앞에서는 판단력을 잃었어? 그 여자는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예전에도 그녀는 양민하를 싫어했다. 양민하는 명예와 이익을 위해 강시현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는데 지금 그 사람이 권력을 잃자 서둘러 이혼하고는 돌아와 강시현에게 매달렸다.
그 속셈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보아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사랑꾼 아들은 회사의 실적은 곱절로 올리지만 사랑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전미자가 또 입을 열기도 전에 문소리가 나더니 유지민이 걸어들어왔다.
“할머니, 오늘은 수정과 드셨어요?”
유지민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아니면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전미자는 유지민을 좋아했는데 그녀가 나타나자 화가 누그러들며 눈매에도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할머니 앞에서 저는 감히 나쁜 생각을 할 수 없는걸요.”
유지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는 다리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귀엽게 말했다.
“삼촌은.는 원래 양민하 씨와 일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저도 어제 보았는데 그 장소에는 양민하 씨의 매니저도 있었어요. 그건 가짜 홍보기사예요.”
“정말이야?”
전미자는 강시현을 흘겨보았다.
강시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곧 시선을 피하며 쌀쌀하게 대답했다.
“네.”
“흥!”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 본 전미자는 그에게 귀띔했다.
“나도 그러길 원해. 너도 내 수단이 어떤지 보고 싶지 않을 거잖아. 라밤시에는 수많은 명문가가 있지만 그 아가씨들은 물론이고 양민하도 우리 지민이 털끝만큼도...”
“오늘 바빠서요.”
강시현은 냉랭한 얼굴로 전미자의 말을 끊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별일 없으면 저 먼저 갈게요.”
유지민은 눈을 내리깔았지만 짙은 속눈썹 사이로 그녀의 슬픈 눈빛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양민하의 나쁜 말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이렇게 지켜줘야 한단 말인가?
그때 그녀도 그의 보살핌을 받았다. 손에 들면 부서질까 봐, 입에 넣으면 녹을까 봐 세심히 돌봐줬다.
하지만 그녀가 이 모든 것을 깨버렸다.
전미자는 손을 내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서 가, 널 보면 화나니까.”
유지민이 부드럽게 인사했다.
“삼촌, 잘 가세요.”
강시현은 그녀를 쌀쌀하게 보며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전미자는 가정부를 시켜 과자를 올리게 하고는 요즘 따라 수척해졌다며 많이 먹으라고 당부했다.
유지민은 가슴이 뭉클해져 얼굴을 붉혔다. 그녀와 강시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할머니는 계속 그녀를 아껴줬다. 갑자기 유지민은 떠나기 아쉬워졌다. 강시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미자 때문이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유지민은 입을 열어 작별인사를 올렸다.
“미안해요. 할머니, 저는 아마 앞으로 자주 보러오지 못할 것 같아요.”
전미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는데?”
“저는 파키슨 대학교에 석사 공부하러 가게 됐어요.”
유지민이 말하자 전미자는 놀라 되물었다.
“혼자 가는 거야?”
유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파키슨 대학교는 엄마 아빠의 회사가 있는 도시에 있어 저는 두 분과 함께 살 수 있어요.”
전미자는 잠자코 말이 없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가족이 단란하게 모이는 것도 좋은 일이고 석사 공부를 하며 능력을 키우는 것도 좋은 일이야. 이 노인네를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 할머니는 네가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그리고 혼인 문제도 잊으면 안 돼.”
“할머니, 놀리지 마세요.”
유지민이 말했다.
“작은 삼촌을 따라 배우지 마. 사람을 볼 줄도 잘 모르잖아.”
전미자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민이는 착한 아이야. 할머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그럼요. 잘 알고 있어요. 할머니.”
유지민은 전미자와 오랫동안 얘기하다가 떠났다. 병원의 긴 복도를 지나며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도리는 다 알고 있지만 행동에 옮기자니 너무 어려웠다.
마음은 하나뿐이고 이미 그 사람으로 가득하여 있었다.
잊기는 어렵지만 유지민은 그래도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