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개학 셋째 주에 유지민은 퇴학 신청서를 제출했다.
별표 메일을 클릭하니 해외 파키슨 대학교에서 보낸 입학 통지 메일이 보였다. 메일이 도착한 시간은 석 달 전이었다.
그녀는 원래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파키슨 대학교에 가서 계속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국내의 강하 그룹 홍보부 팀장을 맡기로 했다.
그 사람, 강시현은 그녀의 작은 삼촌이다.
근데 지금은...
시선은 컴퓨터 화면에 뜬 가십 뉴스로 향했다. 큰 글자로 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강하 그룹 상속인, 첫사랑과의 밀회, 여자 집에 밤늦게까지 머물렀다!]
책상 앞의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다급한 벨 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되돌렸다.
“유 팀장님, 가능한 한 빨리 하늘 호텔로 가 주세요. 강 대표님이 호텔에 계시는데 어르신께서 팀장님이 직접 가서 처리하라고 하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전미자의 비서였다. 그의 말 속에는 매우 심각한 뜻이 담겨 있다.
새벽 2시의 호텔.
전미자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생각해보니 간단한 일이 아니긴 했다. 조금 전의 가십 뉴스를 떠올린 유지민은 강시현이 누구와 함께 호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유지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 전화를 끊은 후 서둘러 호텔로 갔다.
전미자의 비서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방 카드를 그녀에게 건넨 후, 홍보팀과 함께 먼저 떠나 준비하려 했다.
유지민은 방 카드를 손에 꼭 쥔 채 심호흡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방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곧게 뻗은 종아리였다. 위쪽에는 하얀 목욕 수건으로 싸인 하반신이 복근까지 연결되었고, 매끄러운 가슴과 힘찬 팔뚝에는 여러 개의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유지민는 더는 생각하지 못하고, 황급히 눈을 들어 강시현의 냉담하고 귀찮은 눈빛과 마주했다.
그 눈빛은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차갑고 낯설었다.
“저...”
말이 나오기도 전에 시선은 먼저 방 안의 어지러운 큰 침대에 떨어졌다. 가십 뉴스에 등장한 첫사랑 양민하는 문을 등지고 고개를 숙인 채 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는데 두 손은 당황스럽게 옷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유지민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그녀는 또 예전처럼 눈치 없이 그와 첫사랑이 모처럼 만나는 달콤한 시간을 방해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머리 위에서 강시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지민은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치켜떴다.
“누군가가 파파라치에게 삼촌의 행방을 알려줘서 지금 호텔 아래에 파파라치들로 꽉 차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나에게 처리하라고 하셨고요.”
강시현은 쌀쌀한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었다.
“새벽 2시 반, 역시 홍보팀 팀장이 책임감이 있네.”
미지근한 한마디,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유지민은 예리하게 그가 기분 나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자신이 눈치 없이 그들의 좋은 일을 방해했기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유지민은 한순간 그의 뜻을 알 수 없어 조용히 설명했다.
“제가 두 사람의 일을 방해한 거면... 사과는 할 수 있지만 할머니께서...”
“”할머니로 날 누르지 마.”
강시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차가운 눈빛을 지은 그의 목소리엔 경고의 뜻이 역력했다.
“”네가 무슨 신분으로 내 일에 참견해?”
유지민은 갑자기 멍해졌다.
‘그러네, 내가 무슨 신분이란 말인가.’
빌붙어 사는 이웃집 아이일 뿐인데 잊지 못할 첫사랑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지난 8년간의 짝사랑은 마치 밀봉이 잘 안 된 식초 단지처럼, 시큼하고 떫은맛이 스멀스멀 촘촘한 틈에서 쏟아져 나와 그녀를 감싸며 그녀의 사지를 시큰한 고통 속에 적셨다.
지금 눈앞의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짝사랑이 희망이 없는 참혹한 전쟁임을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완벽하게 패배했지만 너덜너덜해진 영혼으로 그들의 사랑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고 길을 터주어야 한다.
유지민은 아픔을 참으며 목구멍까지 끓어오르는 피비린내를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아래층에 많은 파파라치가 잠복해 있고, 호텔 복도에도 CCTV가 있어요. 호텔 CCTV 영상을 비싸게 사는 사람이 없을지 장담할 수도 없고요. 어쨌든,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삼촌, 먼저 저를 들여보내고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빌다시피 했다.
강시현은 2초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비켜서 방문을 열었다.
비록 매우 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는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소리치고 있지만 할머니를 생각하자 유지민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그 어지러운 침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창가로 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하 그룹 홍보팀 팀장, 유지민입니다.”
유지민은 양민하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 양민하야.”
양민하는 수줍게 웃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사실 다 내 탓이야. 술이 약한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많이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 시현이가 콜택시 기사가 졸음운전을 할까 봐 걱정되어 일부러 자기 기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바람에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기회를 줬어.”
‘졸음운전?’
유지민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눈앞에는 8년 전의 그 충격적인 교통사고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녀는 여전히 강시현이 무척이나 아끼는 소중한 조카딸이었다. 그날 밤 그녀가 야간 자율학습이 끝났을 때 폭우가 내렸다. 알고 보니 그녀를 데리러 온 운전기사의 차가 중간에 고장이 났다. 그래서 강시현은 바로 접대를 마무리하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때 그는 매우 바빴다. 며칠 동안 계속 그를 따라다니던 운전기사는 피로 운전으로 마주 오는 차와 충돌했다. 교통사고 현장은 매우 참혹했다. 운전기사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유지민은 강시현의 품에 꼭 안겨 가벼운 부상만 입었지만 강시현은 중환자실에 한 달 동안 머물렀다. 깨어난 후 가장 먼저 물은 질문은 유지민의 상태였다.
그 이후로, 유지민의 운전기사는 3개월마다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전에 생명처럼 아끼던 온갖 보살핌은 강시현의 그녀에 대한 편애였고, 또한 유지민의 마음 한구석에 싹튼 씨앗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모든 게 변한 게 아니라, 모두 그녀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유지민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니 고마울 필요 없어요. 잠시 후에 삼촌... 강 대표님과의 협조 잘 부탁드립니다.”
양민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뭔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지민 씨는 옆집 산다는 그 동생이지?”
유지민은 어리둥절해서 무표정한 강시현을 힐끗 보고는 돌아서서 양민하에게 물었다.
“저를 알아요?”
“응.”
양민하가 손을 뻗어 강시현의 옆에 늘어뜨린 손을 잡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시현이가 지민 씨에 관해 말했었어. 전에도 항상 농담으로 우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하며, 숙모라고 부르게 할 거라 했거든.”
‘숙모?’
이 단어는 마치 두 자루의 비수처럼 유지민의 심장을 강하게 찔러 상처투성이인 심장을 너덜너덜하게 했다.
유지민은 입술을 세게 깨물고 간신히 유지하던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
“홍보팀이 모두 아래층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양민하 씨와 강 대표님 쪽에 문제가 없다면 가능한 한 빨리 내려가세요.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말을 마친 후 유지민는 거의 도망치듯 황급히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양민하와 강시현은 함께 회의실에 도착했다. 대책은 복잡하지 않았다. 강하 그룹 산하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양민하와 협력하여 영화를 제작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하고, 양민하는 이 성명을 전달하고 지난 두 번의 만남에 모두 제작진 동료들이 참여했다고 설명하면 되었다.
모든 처리가 끝나자 날이 이미 밝았다.
강시현과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책임자는 홍보 기획에 따라 양민하를 집에 데려다주고, 유지민은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지금의 그는 더는 그녀가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게 하는 것조차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또다시 밝아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도 과거를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휴대폰 이메일을 열고, 그 입학 이메일 아래에 있는 확인 링크를 클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