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양민하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말했다.
“네 삼촌은 알고 있어? 요즘 우리가 함께 살 집 꾸미느라 바쁘거든. 안 그러면 내가 대신 가서 말씀드릴까?”
유지민의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은 듯했고 싸늘한 기운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답했다.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양민하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정말 순진하기 짝이 없군. 귀국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흔들리나? 설마 해외로 떠난다고 해서 시현이를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유지민을 바라보며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안타깝게도 그 수법이 너무나도 서툴렀다.
유지민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홍보팀에는 긴급 지시가 떨어졌다.
비서 조혜영이 노트북을 들고 다가왔다.
“팀장님, 대표님과 양민하 씨가 어젯밤 연회장에서 함께 떠나는 장면이 몰래 찍혔습니다. 이제 스캔들이 확정된 거나 다름없어요. 지난번 기획했던 해명 시나리오로는 팬들에게 설명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지금 팬들이 난리가 났어요. 양민하 씨가 팬들에게 무책임하다고들 해요. 영화 홍보 중인데 스캔들이 터졌다고 투자자들도 감독도 불만이 많습니다.”
유지민은 시선을 들었는데 그 눈동자에는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번졌다.
‘기자들이 몰려든다는 걸 알면서도 왜 조심하지 않은 거지? 양민하야 그렇다 쳐도, 왜 삼촌까지 선을 넘은 걸까?’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사무실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유지민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유지민, 내가 너한테 너무 관대한 건가? 민하에게 물을 끼얹은 일, 네가 사과하지 않아도 참았어. 그런데 이번엔 일부러 여론을 조작해서 민하의 커리어까지 망치려는 거야?”
강시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그녀가 양민하를 모함했다고?
유지민은 차갑게 웃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대표님, 어젯밤 저는 누군가에게 스토킹을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론을 조작할 시간이 있었을까요?”
“그래서 아직도 민하를 원망하는 거야? 어젯밤 민하가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데리고 나간 거야.”
유지민의 눈이 붉어졌고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강시현의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흘 내로 이 문제를 해결해. 민하가 새 작품에 차질이 생기면 안 돼.”
유지민은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양민하 씨의 앞길이 그렇게 중요하셨다면 왜 대중과 기자들에게 노출되게 만들었어요? 집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유지민!”
강시현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울려 퍼졌는데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유지민은 가볍게 비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마침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던 인사팀장이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팀장님, 사직서가 이제 서명 절차만 남았습니다.”
조혜영을 비롯한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유지민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정말 사직하시는 건가요?”
“팀장님, 이건 팀장님이 책임 져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인사팀장은 강시현에게 감히 반항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양민하를 위해 유 팀장만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모습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유지민은 시선을 내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이 문제만 해결하고 떠날게요.”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녀를 길러준 은혜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었다. 이것만 갚으면 이제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유지민이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수많은 악성 댓글과 허위 계정들이 양민하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그녀의 홍보 전략은 더욱 복잡하고 난감한 국면에 처했다.
유지민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눈빛을 좁혔다.
혹시 양민하가 일부러 여론을 조작해 자신을 괴롭히려고 고용한 악플 부대일까?
양민하가 정말 커리어를 신경 썼다면 강시현과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걸 보니... 설마 그녀 눈에도 자신이 견제해야 할 경쟁자로 보이는 걸까?
유지민은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통증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한밤이 되도록 유지민은 각종 온라인 마케팅 채널과 조율하며 양민하와 그룹을 위한 해명 문구를 작성하고 있었다.
도촬 사진이 올라온 걸 확인하자 유지민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가볍게 쳤다.
‘유지민, 정신 차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작스럽게 복부를 부여잡았다. 격렬한 통증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는데 위경련이 다시 도진 것이다.
유지민은 책상에 엎드린 채, 고통을 참기 위해 온몸을 웅크렸다.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에서 어느새 그녀의 자리만 희미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유지민은 손에 쥔 휴대전화를 꼭 움켜쥐고,강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건 양민하였다.
“지민아? 시현이한테 할 말 있어? 지금 샤워 중인데, 내가 대신 전해줄까?”
그 순간, 유지민은 끝없는 절망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여기서 그의 홍보 문제를 해결하느라 애쓰고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밀어내지 못하고 또다시 함께 뒤엉켜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던 몸이 이내 차갑게 식어갔다.
유지민은 간신히 목소리를 찾아냈다.
“아뇨, 괜찮아요.”
양민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내가 대신 전해줄게.”
전화를 끊은 후, 양민하는 강시현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아무렇게나 숫자를 눌러도 잠금 화면은 손쉽게 풀렸다.
역시나, 강시현의 비밀번호는 여전히 그녀의 생일이었다.
양민하는 손가락을 움직여 강시현의 휴대전화를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한 후 아무렇지 않게 창을 닫고 침대 머리맡에 던져 두었다.
그 시각, 유지민은 사무실 책상에 엎드린 채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결국, 야간 순찰을 돌던 경비원이 그녀를 발견했고 급히 119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했다.
진단명은 급성 맹장염.
수술을 마친 후, 새벽녘까지 병상에 누워 있던 유지민은 문득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결국 그녀가 이곳을 떠나는 것이 답이었다. 강시현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결심한 유지민은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그녀와 강시현의 기억이 곳곳에 남아 있었는데 모두 그가 준 것들이었고 그녀는 지금껏 그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유지민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방에 담았고 그대로 내려가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방금 수술을 마친 몸은 아직 쇠약했다. 짐을 끌고 계단을 내려오던 중, 문득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강시현이었다.
그녀를 보자 강시현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건 뭐야?”
유지민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필요 없는 걸 좀 버리려고요.”
“한밤중에 갑자기 정리하고 싶어진 거야?”
강시현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마치, 무언가가 손을 벗어나려 하는 것만 같았다.
유지민은 그를 올려다보며 평온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이제 필요 없어서요. 그래서 버리려는 거예요.”
강시현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민, 한밤중에 소란 피우지 마.”
유지민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소란 피우는 거 아니에요. 삼촌도 민하 숙모랑 곧 좋은 결실을 맺으시겠죠. 앞으로 제 일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 그리고 이메일로 사직서도 보냈어요. 검토해 주세요.”
길게 끌 바엔 차라리 단칼에 끊어내는 게 나았다. 그녀는 상처를 후벼 파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난도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강시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는데 그 안에는 불쾌함이 어렸다.
“민하의 홍보 문제는...”
“양민하 씨의 홍보 처리는 마무리하고 떠날 겁니다.”
유지민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