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0화

유지민은 심하게 취해 있었고 남자의 말을 듣고는 온몸이 더욱 떨렸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눈앞의 남자가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이 마치 깊은 애정을 품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유지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지만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남자는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 가슴속 깊이 쌓여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왜 나를 원하지 않는 거예요! 왜 날 보면서도 못 본 척하는데요? 내 사랑이 그렇게도 보잘것없어요?” 유지민의 눈물이 쏟아졌고 한 방울이 남자의 정장 위에 떨어졌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 그 인간이 널 괴롭혔어?” 유지민은 자신의 감정에 깊이 빠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얽히고설킨 감정 속에서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강시현 씨, 당신은 날 어릴 때부터 키웠다면서.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다른 여자 때문에 날 믿지 않고 모욕까지 해요.” “맹세할게요. 난 정말 더 이상 당신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남자는 그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는데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정말?” 그러나 유지민은 흐느끼느라 그의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정장을 움켜쥐고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눈물은 마치 끊어진 구슬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러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정장 원단의 감촉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남자의 맞춤 수제 정장을 망쳐 버린 것 같다. 게다가 그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삼았으니... 남자는 미세하게 숨을 들이마셨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를 안은 채 호텔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 내려놓이자마자 유지민은 더욱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어 어둑했다. 유지민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세 개의 숫자를 힘겹게 눌렀다. 한편, 남자가 욕실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따뜻한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유지민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단지 가녀린 손가락으로 휴대전화를 꽉 움켜쥔 채, 화면에는 ‘112’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그때 남자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어, 지금 갈게.” 남자는 유지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아쉬운 듯 방을 나섰다. 다음 날 아침, 숙취에서 깨어난 유지민은 머리가 깨질 듯 아플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몸은 개운했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채였다. 게다가 침대 옆에는 보온병이 놓여 있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유지민은 그것을 집어 들고 물을 마셨다. 여전히 따뜻한 물이 목을 부드럽게 적셔 주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린 후, 어젯밤 일을 곱씹었다. 어젯밤... 그녀는 한 남자에게 구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를 감정 쓰레기통처럼 이용했지. 그 남자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유지민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넓은 방 안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유지민은 고개를 숙여 눈에 서린 감정을 감추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머리맡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순간, 그녀의 몸이 굳었다. 화면에 뜬 ‘삼촌’이라는 연락처를 보자 그녀의 목이 더욱 바짝 말랐다. 유지민은 가슴속의 씁쓸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몇 초간 머뭇거리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질책이 들려왔다. “오늘 왜 출근하지 않은 거야? 유지민, 너 요즘 점점 버릇 없어지는구나.” 유지민은 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 그가 양민하를 위해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모욕을 당하는 걸 보고도 외면한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 이제 그녀도 그의 관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리를 두는 편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더 이상 강시현의 곁을 바라볼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는 천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지민은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회사로 가겠습니다.” 강시현은 주저 없이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 도착한 유지민은 곧바로 일에 몰두했다. A국으로 떠날 날까지는 일주일, 그녀는 마지막 업무 인수를 마무리하려 했다. 홍보팀 직원들은 대부분 그녀가 직접 키운 인재들이었다. 그녀가 하나하나 업무를 나누자 직원들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팀장님, 이런 중요한 업무는 한 번도 저희에게 맡기신 적 없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우리에게 넘기시는 이유가 뭔가요?” 유지민은 조용히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반년이요.” “여덟 달이요.” “세 달...” 각자 대답이 돌아왔고 유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성장할 수 있어.” 직원들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팀장님, 얼굴이 안 좋아 보이세요. 눈도 부어 있고요.” 그 말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유지하던 평정을 산산이 깨뜨렸다. 유지민은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는데 화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드리운 슬픔과 우울은 감춰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오랜 연인이 바람을 피우고 내연녀에게 밀려난 여자처럼 보일 것이다. 유지민은 멍하니 시선을 거두고 두 손을 세면대에 짚었다. 마음을 추스르려던 찰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손끝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우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아린 씨한테만 말하는 거예요. 시현이랑 저, 오래전부터 서로를 기다려 왔어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이제는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어머,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민하 씨야말로 대표님께서 몇 년 동안 그리워한 첫사랑이었군요! 세상에, 대표님 정말 너무나도 깊은 사랑을 하셨네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니...!” 양민하는 수줍게 웃으며 자연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건 비밀로 해줘요. 시현이가 절 지켜주고 싶어 하거든요. 전 지금 커리어가 중요한 시기라 연애 사실이 공개되면 여러모로 부담이 크니까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민하 씨!” 그 순간, 유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양민하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양민하는 동료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손짓한 뒤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민아, 우연이네. 어제 술자리가 끝나고 너도 데려가려고 했는데... 시현이가 그러더라. 너는 원래 술을 잘 마시고 또 책임감도 강하니까 별일 없을 거라고.”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날 선 칼처럼 살갗을 베어냈다. 유지민은 손을 꽉 쥐었으나 표정은 한결같이 차분했다. 양민하의 눈을 바라보는 시선만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 “시현이가 그러는데, 예전에 너를 너무 버릇없이 키워서 이 지경이 됐대. 그치만 나는 네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앞으로 시현이가 너한테 못되게 굴면 나한테 와. 숙모가 널 지켜줄게.” 양민하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걱정 마, 시현이는 신경 안 써도 돼. 나는 그냥 지민이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유지민이 무의식적으로 손끝을 움켜쥐자 얇은 원피스 천이 손아귀에서 깊이 구겨졌다. 그녀는 곧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저 곧 해외로 나갈 거예요.”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