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제법 성깔이 있네.'
거래처 관계자는 한 번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차피 잔뜩 취하고 나면 결국 흐느적거리며 말랑하게 녹아내릴 거 아닌가?
강시현이 허락한 덕분에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유지민을 향해 술잔을 들이밀었다.
잔이 거듭 비워질수록 속이 들끓으며 요동쳤다.
그녀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강시현을 좇았다.
멀찍이서, 강시현은 양민하와 나란히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차가움과 달리, 지금 그의 얼굴에는 한결 편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유지민의 가슴을 깊숙이 후벼 팠다.
강시현은 양민하의 사람이었다. 그의 세계에 그녀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술기운은 빠르게 그녀를 휘감았고 볼에는 이상할 정도로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유지민은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악취 나는 남자들을 힘겹게 밀쳐낸 후 화장실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몇몇 거래처 인사들이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마침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유지민 씨가 취한 것 같네요. 화장실에 가서 토하게 둡시다. 여자한테 억지로 술을 먹이는 건 신사가 할 일이 아니죠.”
멀리서 강시현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 유지민은 입을 틀어막은 채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그 눈빛에는 스쳐 지나가는 미묘한 감정이 서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 양민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아, 지민이 술 정말 잘 마신다. 나야 반도 못 따라가겠네. 부럽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나도 오늘부터 연습해야겠어!”
그 말에 강시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민하야. 앞으로 네가 이런 자리에서 애쓸 일은 없을 거야.”
유지민에 대해선...
그는 그녀가 예전에 김유성과 함께 바에서 거침없이 술을 들이키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쉽게 취해 버렸다? 또다시 양민하와 경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이런 유치한 수법이 아직도 질리지 않은 거야?
한편, 유지민은 창백한 얼굴로 화장실에 뛰어들었는데 속이 뒤집혀 참을 수 없는 복통이 밀려왔다.
고농도의 술이었기에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변기에 몸을 지탱한 채 그녀는 남아 있던 술을 모조리 게워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쥔 채 그녀는 속이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끝없이 토해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입가를 대충 닦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수를 하려던 찰나 문을 막 열고보니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술에 잔뜩 취한 그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허리춤의 벨트를 푸는 중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눈빛에 음흉한 기색이 스쳤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걸친 채 그는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아가씨,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오빠가 잘 보살펴 줄까?”
유지민은 태양혈이 쿵쾅거리며 뛰었고 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즉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가 지나가는 순간, 거친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순간,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별다른 생각조차 할 겨를 없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둘렀다.
금속 체인이 남자의 이마를 강타했고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 유지민은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그러나 술기운에 몸이 풀려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뒤쪽에서 남자가 격분한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쫓아왔다.
“감히 날 때려? 오늘은 꼭 널 호텔로 데려가고 말 거야. 어차피 화장실까지 온 거, 누가 데려가길 바란 거 아냐?”
유지민은 남은 힘을 짜내 화장실 출구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문턱을 넘기 직전, 갑자기 머리채가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순식간에 두피가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아쳤고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떨렸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두꺼운 손이 그녀의 허리선을 움켜쥐는 순간, 온몸에 오싹한 전율이 번졌다.
“도망?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날 때려?”
그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기회를 줄게. 순순히 따라와서 밤을 함께 보내면 기분 좋게 보내줄 수도 있지.”
유지민은 절박하게 몸부림쳤다.
그 순간, 시야 너머로 강시현이 양민하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떠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삼촌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설마 이런 상황에서 그냥 모른 척하진 않겠지? 이대로 다른 남자에게 농락당하는 걸 두고 보기만 할 리 없잖아!
입을 열어 외치려던 순간, 남자의 손이 거칠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였다.
양민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눈빛이 교차하는 찰나, 유지민은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서늘한 비웃음을. 그건 승자의 미소였다.
유지민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양민하는 일부러 몸을 기울이며 강시현의 품에 안겼다.
강시현은 즉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민하야, 괜찮아? 지금 바로 나가자.”
“음... 음...”
유지민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도움을 청했다.
어쩔 도리가 없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남자의 손바닥을 세게 물었다.
“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는 순간, 비로소 강시현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가 본 광경은 낯선 남자와 엉켜 있는 유지민의 모습이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양민하가 이마를 짚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현아, 나... 위염이 또 도진 것 같아...”
그 한마디가 강시현의 생각을 단번에 끊어놓았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양민하를 부축하며 자리를 떠났는데 유지민의 애절한 호소에도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 유지민의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눈가까지 붉게 물들며 아릿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한때 강시현이 베풀었던 따스함이 이제는 차디찬 칼날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속이 뒤틀리듯 아파왔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술기운이 몸을 타고 퍼졌고 남자는 그 틈을 타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더듬었다.
유지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곧 피가 배어나왔다.
“놔줘... 놔달라고...!”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이렇게 입고 온 것도 결국 호객행위 아니었어? 이런 수법, 수도 없이 봤거든.”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축 처진 살이 겹겹이 엉겨 붙었고 번들거리는 이마에서는 기름이 배어 나왔다.
유지민은 속이 뒤집히듯 메스꺼웠지만 몸을 뺄 힘조차 없었다.
위험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 낮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불현듯 공간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여자를 괴롭히는 게 남자라고 할 수 있나?”
희미하게 흐려진 시야 너머, 유지민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선 남자는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고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서 우아한 기품이 배어나왔다.
유지민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 저기요... 제발, 도와주세요...”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오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손끝이라도 더 대보지?”
그제야 술 취한 남자는 숨을 들이켰다.
눈앞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는 순간, 마치 얼음장에 갇힌 듯 몸이 굳어버렸다.
그 틈을 타 유지민의 몸이 풀려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고 결국 앞에 선 남자의 품으로 쓰러졌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 감돌았다.
몸을 간신히 가누려 했지만 술기운 탓에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곧장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지민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남자의 팔이 단단하게 그녀를 감쌌고 유지민의 몸이 공중으로 들려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