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그 남자의 침묵
국립이든 사립이든 변태들은 어디를 가도 있었다.
심지어 돈 많은 변태들은 변태 짓을 하는 것에 더 거리낌이 없었다.
이가인은 혜임 병원에서 일한 지도 어언 6년이 되는 간호사라 그간 간호사들을 희롱하는 남자환자들도 봤었고 남자 의사를 스토킹하듯 쫓아다니는 여자환자들도 봤었다.
물론 가장 많이 본 건 환자가 약해진 틈을 타 그들을 꼬시려는 간호사들의 행동이었다. 이곳은 돈 좀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물론 진심으로 남자를 좋아해 유혹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남자들에게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유부남이든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비밀 애인을 자처하는 가벼운 사람들도 있었다.
이가인은 놀란 가슴을 빠르게 진정시키고 차분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다리 때문에 바지를 입는 게 불편하셨나 보군요. 금방 직원을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자는 놀란 기색 하나 없는 이가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이 입혀줘.”
“남성 직원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난 그쪽이 입혀주는 게 좋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잖아?”
이가인은 느끼한 얼굴로 작업 거는 남자의 말에도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병원 규정상 환자분의 요구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10초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바로...”
“한달에 얼마 받아?”
남자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에도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그 남자친구는 한달에 얼마 버는데?”
이가인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액수를 불러. 그쪽이 상당히 마음에 들거든. 원하는 대로 줄게.”
“따로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여기 간호사 중에 내 친구랑 연애하는 여자들 많거든? 혹시 적게 부를까 걱정되면 그 여자들한테 물어보고 와도 돼.”
“따로 시키실 일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남자는 이가인이 발걸음을 돌려 나가는 순간까지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인생 역전할 기회는 흔치 않아. 그러니까 튕기지 말고 내 말 한번 다시 잘 생각해봐.”
이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다음날 밤.
남자가 있는 호실에서 또다시 콜이 오자 이가인은 남성 간호사를 보냈다.
그런데 병실로 들어간 지 채 30초도 되지 않아 남자 동료가 바로 나오더니 이내 이가인의 곁으로 다가와 작게 말했다.
“저 말고 가인 씨더러 들어오라는데요?”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지만 워낙 주위가 조용했던 탓에 간호사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이가인에게로 집중됐다.
이가인은 지금 상당히 곤란했다. 그도 그럴 게 혜임 병원의 VIP 병실 환자들은 못 해도 회사 하나는 운영하고 있는 부자들이었으니까.
만약 그녀의 거절로 남자가 앙심을 품고 복수라도 하면 그때부터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이가인은 지금 수간호사를 목표로 하고 있기에 되도록 잡음은 일으키지 않는 게 좋았다.
이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뒤쪽에서 바로 간호사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실로 들어간 이가인은 6년 차 간호사답게 얼굴에 미소를 장착하고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병상에 누운 채로 시선만 그녀에게 고정했다.
“생각해 봤어?”
“말씀은 감사하지만 환자분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니 인생 역전 같은 기회는 저 말고 다른 분께 넘겨주세요.”
“한 번에 2천, 혹은 한달에 3억, 둘 중에 하나 골라봐.”
남자가 그녀에게 선택지를 던졌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널 내 침대 위로 끌어들일 수 있어. 그런데 그러지 않은 건 네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것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시고 계속 병실에만 있어 답답함과 무료함을 느낀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정 병실에만 있는 게 답답하시면 제가 교수님께 얘기해 조금 더 쾌적한 병실로 옮겨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이가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심심했던 건 맞아.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혹시 내가 돈 얘기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한 건가? 그러면 지금부터는 돈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진지하게 가인 씨한테 작업을 걸도록 하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그럼 그 남자친구더러 날 찾아오라고 해. 난 너 포기할 생각 없으니까.”
남자는 상당히 끈질겼다.
이가인은 병실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아 대충 대화를 마무리한 다음 서둘러 병실에서 나왔다.
병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소문은 점점 더 부풀려질 테니까.
이가인은 남자의 시달림을 피하는 방법으로 다시금 근무 시간을 조율할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하면 그녀를 질투하는 동료들이 아직 수간호사도 된 것도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근무 시간을 조율한다고 또다시 뒷담화를 할 게 뻔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나이트 근무를 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일단 지속해서 남자의 시달림을 받게 될 테고 그녀를 질투하는 무리들이 이번에는 VIP 병실 환자와 그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이상한 소문을 낼 테니까.
이가인은 고심 끝에 간호과장에게 현 상황을 보고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말은 가급적이면 환자들과 불필요한 마찰은 빚지 말라는 말과 수간호사 자격을 평가하는 중요한 시기이니 조금만 참으라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희망까지 잃게 된 이가인은 결국 7일을 스트레스 속에서 보내다 드디어 남자가 퇴원하는 날까지 버텨냈다.
남자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진 그녀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침 햇살을 맞으며 퇴근했다. 하지만 막 병동에서 나와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웬 차 한 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VIP 병실 남자의 차였다.
이가인은 차에 올라타라는 경호원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끌고 와.”
“네, 알겠습니다.”
경호원들은 무서운 기세로 다가왔고 이에 이가인은 뒷걸음질 치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뭡니까?”
이가인이 뒤를 돌아보니 고현우가 얼굴을 굳힌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가인이 웬 VIP 병실의 남자환자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는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차량 뒷좌석에 탄 남자가 바로 그 환자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고현우가 이가인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때 차 안에 있던 남자가 차창을 내리더니 고현우를 향해 물었다.
“그쪽이 바로 우리 가인 씨 남자친구인가?”
고현우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가인과 함께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듯 병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남자의 경호원들이 곧바로 두 사람을 막아섰다.
“어이, 가인 씨 남자친구 아니면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
그 말에 고현우가 차가운 눈길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보아하니 이곳 의사 같은데 지금 바로 꺼지지 않으면 이 병원의 환자로 2주간 입원하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
남자의 협박에서 불구하고 고현우는 정말 신고하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경호원 빠르게 다가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차 안의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느긋한 얼굴로 휴대폰을 건네받더니 이내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옆에 있는 분수대 안에 던져버렸다.
“지금 뭐하는...!”
고현우가 분노한 얼굴로 쏘아붙이려는 그때 이가인이 그를 막아섰다.
“교수님은 이만 출근해 보세요. 휴대폰은 제가 이따 건져드릴게요. 만약 고장이 났으면 새것으로 변상해 드릴게요.”
고현우는 그녀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이가인의 생각은 단순했다. 고현우는 이제 그의 남자친구도 뭣도 아니니 굳이 그를 끌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