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모른 척하려는 건가?
이가인은 간호과장의 지시대로 정승진에게 병동 곳곳을 안내해주었다.
분명히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람 두 명을 더 끼워 넣어도 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건 이가인이었다. 정승진이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녀에게 어젯밤 일에 대해 갑자기 얘기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40분 가까이 안내를 받으면서 정승진은 마치 어젯밤 일은 다 잊은 듯 사적인 질문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안내 시간이 끝이 나고 정승진은 예를 갖춰 그녀에게 말했다.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길을 헤매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뭘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가인의 말에 정승진이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는 가인 씨가 더 선배니까 제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앞으로 저 잘 챙겨주세요.”
이가인은 이게 은근한 플러팅인 건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인지 헷갈렸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그녀가 그보다 병원에 오래 있었다고 해도 교수가 일개 간호사의 챙김을 받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게다가 그는 미소를 지으면 금방 날티나는 얼굴이 되어버려 하는 말의 의도를 알아채는 게 쉽지 않았다.
물론 그 미소 때문에 어젯밤 클럽에서 그의 손을 잡은 거였지만.
이가인은 간단하게 그에게 눈인사한 후 먼저 그를 보냈다.
그러고는 정승진이 뒤돌자마자 바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날 못 알아본 건가? 아니면 나처럼 어차피 하룻밤 일이니 모른 척하려는 건가? 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종사로에서 그녀가 사람을 구했다는 얘기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이가인이 멍하니 자리에 서 있던 그때 고현우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가인은 고현우를 확인하고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룻밤 상대와 동료가 된 것도 모자라 자신을 섹파라고 칭하는 사람과도 동료인 자신의 신세가 새삼 기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간호스테이션으로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 앉자 간호사들이 우르르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정 교수님 여자친구 있대요?”
“고작 병동 안내해준 것뿐인데 여자친구 얘기할 시간이 있었겠어요?”
“혜임에는 단기로 있는 거래요 아니면 여기서 쭉 근무하기로 한 거래요?”
“그건 내가 아닌 장대호 교수님께 여쭤야죠.”
“아까 회의실에서 나올 때 고현우 교수님이랑 인사하는 걸 봤는데 혹시 친구 사이래요?”
이가인은 막힘없이 다 대답하다가 이 질문에서는 잠깐 멈칫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병동 안내해주면서 무슨 얘기 했어요?”
“어느 과에 솔로 간호사분들이 더 많은지에 대해 얘기했어요.”
“진짜요?! 그래서 제 얘기는 했어요?”
“저는요?!”
이가인은 농담이 분명한 말인데도 눈을 반짝이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임 병원의 의료진들은 대체로 3교대로 근무하며 간호사들은 3일의 데이 근무와 한 번의 이브닝 근무, 그리고 한 번의 나이트 근무를 하고 이틀의 오프를 갖게 된다. 5일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국립 병원과는 달리 사립인 혜임에서는 원하는 대로 근무 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고 데이 근무를 나이트나 이브닝 근무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어떤 근무 시간을 선택하든 받는 돈은 똑같았기에 데이 근무 대신 힘든 나이트 근무를 서겠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가인은 망설임 없이 데이 근무를 나이트 근무로 바꿨다.
이유는 고현우가 부교수 타이틀을 달게 된 후 나이트 근무를 한달에 한 번밖에 서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근무 중에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단지 고현우를 보고 싶지 않아서 한 행동이 동료들에게는 이상한 의도로 전해졌다.
“차라리 아주 나이트 상근직으로 전향하지 그래? 나이트 근무 많이 서 봤자 누가 알아준다고.”
“왜 굳이 모두가 다 꺼리는 나이트 근무를 서겠다고 하겠어요? 당연히 윗분들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죠.”
“회의에서 이름 좀 거론됐다고 이번 기회에 제대로 노 저으려는 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엄청 꼴불견 아니에요? 괜히 우리가 눈치를 봐야 하잖아요. 짜증 나 진짜.”
“누가 아니래요?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서른이 코앞인데도 아직 남자친구도 없고 결혼도 못 하고 있죠.”
“그러니까요. 수간호사 되는 거에 뭘 그렇게 목을 매는지 모르겠어요. 빨리 결혼이나 할 것이지.”
동료들의 뒷담화는 하루도 안 돼 전부 다 이가인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가인은 그들의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도 찬양하는 결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결혼에는 회의적이었다.
하긴 임신한 지 5개월 된 동료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모텔에서 나오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봐버렸으니 그런 생각을 가질 만도 했다.
게다가 남자친구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친구가 사실은 다른 사람의 남자친구이기도 했다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봤으니까. 실제로 그녀의 현 상황도 그러했고 말이다.
새벽 1시.
한창 나이트 근무를 서던 중에 임신 5개월 된 동료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위가 워낙 조용했던 탓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동료 남편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내용을 들어보면 대개 오늘도 집에 못 들어간다는 얘기 같은데 핑계라고 댄 것이 너무나도 성의가 없어 이가인은 헛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때 간호스테이션에 콜이 들어왔다.
이가인은 임신 5개월 된 동료가 모른 척 고개를 돌리자 결국 자신이 받았다.
“네, 뭐 필요하세요?”
“잠깐 이리로 좀 와봐요.”
“네, 잠시만요.”
이가인은 서둘러 VIP 병실로 향했다.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리가 골절된 남자가 병상에 누워 그녀에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화장실 좀 가게 와서 부축해봐요.”
“남성 간호사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쪽은 못 하나?”
“저는 화장실 입구까지 밖에 안내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바로 남성 직원을...”
“그냥 그쪽이 해.”
고집스러운 남자의 말에 이가인은 결국 병상 가까이 걸어가 남자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었다.
하지만 이불을 걷었다가 1초도 안 돼 다시 도로 덮어버렸다.
남자가 윗옷은 멀쩡히 입어놓고 아래는 속옷조차 걸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