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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이유가 뭐야?

이가인도 정말 푹 쉬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히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정승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혹시 그날 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던 거야?” “너 그때 침대에서 계속 떨고 있었어.” “그날 뭣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랑 있을 때는 기분 나빴던 거 잠시 잊을 수 있었잖아. 그리고 그렇다는 건 내가 그 순간만큼은 널 기분 좋게 만들었다는 뜻 아니야?” 심지어는 그가 했던 ‘너랑 호텔로 간 건 단순히 네가 예뻐서 너랑 자고 싶었던 게 다야.’라는 말도 계속 생각이 났다. 그녀가 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을 그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이가인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눈을 감은지 얼마 안 돼 갑자기 심기가 뒤틀리며 화가 밀려와 저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떴다. 정승진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이렇게도 심기가 불편한 건 누군가의 몇 마디 말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였다. “딱 봐도 그런 식으로 여자 많이 홀렸을 텐데 그런 거에 일일이 의미 부여하지 말란 말이야!” 그녀가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이가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별생각 없이 문을 살짝 열어보니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고현우? 네가 여긴 웬일이야?” 잘 아는 얼굴임에도 그녀는 여전히 문을 조금밖에 열지 않았다. 이에 고현우는 그녀가 집에 남자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하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녀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네주었다. “네 태블릿.” 이가인은 손을 뻗어 그에게서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고마워 뒤에 다른 말이 없다는 건 이만 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현우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잠깐 안에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지금은 불편해.” 이가인은 지금 그와 단 1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안에 누구 있어?” 고현우가 갑자기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하며 물었다. ‘마누라 바람난 꼴이라도 본 듯한 저 눈빛은 뭐야?’ 이가인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지만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웅은 안 해도 되지? 잘 가.” 고현우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어짐을 얘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얌전한 고양이 같던 여자가 갑자기 너무나도 쌀쌀맞아졌으니까. ‘설마 정말 정승진이 안에 있기라도 한 거야?’ “안에 누구 있는 거지?” “고현우, 너랑 내가 이런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아?” 고현우는 더는 못 참겠던지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마치 마누라의 바람 현장을 잡고야 말겠다는 남편처럼 집 구석구석을 매의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매의 눈으로 훑어봤자 이가인의 집은 거실 하나에 방 하나 달린 아주 작은 집이라 뭘 찾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고현우는 화장실 문까지 열어젖히고 이 집에 정말 그녀 말고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화를 가라앉혔다. 그는 이성이 돌아오자 그제야 등 뒤에 꽂히는 이가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현우는 당연히 그녀가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가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네 발로 나갈래 아니면 경찰에게 연행되어 나갈래?” 고현우는 뒤로 돌아 이가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가 뭐야?” “질려서.” 고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 들었으니 이제 가줄래?” 단지 질려서 그에게 헤어짐을 얘기했다는 그녀의 말을 고현우가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헤어지는 건 상관없는데 날 등신 취급하면 안 되지.” 이가인은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조롱 가득 섞인 헛웃음을 쳤다. ‘누가 보면 내가 먼저 배신한 줄 알겠네.’ 이가인은 마음 같아서는 고현우의 뺨을 짝 소리 나게 세게 내려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그의 뺨에 손을 대야 하기에 꾹 참았다. 헤어진 남자와 살을 맞대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것도 또 없으니까. “너랑 자는 거 질렸어. 이제는 재미없어져서 싫어.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일하는데 네가 방해돼. 엄마가 너랑 연애하지 말래. 자, 이 중에서 골라. 네가 받아드릴 수 있는 걸 이유로 해줄 테니까.” 이가인은 강수진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걸 꺼냈다가는 고현우와 또 한차례 대화를 섞어야 할 테니까. 고현우는 이가인이 그녀를 빨리 돌려보내려고 이런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미 말투에서부터 귀찮음과 짜증이 한가득 묻어있었으니까. 예전의 그녀는 이렇지 않았다. 그의 인상 속 이가인은 늘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자였으며 언제나 그를 1순위에 두던 여자였다. 그런데 그랬던 여자가 지금은 마치 귀찮은 것을 떨구듯 그를 내쫓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아니, 뭣 때문에 변한 거지?’ “혹시 그 남자환자가 나한테 네 남자친구냐고 물었을 때 내가 아무 말도 안 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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