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이제부터 자유야
초점이 없는 그녀의 두 눈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의사는 입을 막고 온데간데 성한 곳이 없는 여자를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얼굴까지 심하게 망가진 민서희를 보고 차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민서희는 계속해서 물었다. "선생님. 아직 계세요?"
그녀는 손을 뻗었다 갑자기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등... 스위치 어디 있어요? 너무 어두워요! 저 불 좀 켜야겠어요... 불 좀 켜주세요!"
이불을 제끼고 침대에서 급하게 내려가더니 그녀는 옆에 있던 카트에 부딪히며 바닥에 세게 넘어졌고. 카트에 놓여있던 병들은 바닥에 떨어져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조심하세요!" 여의사는 바로 민서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이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옆에 카트 있어서 이동이 불편할 거예요!"
"카트요? 어디에요?" 민서희는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선생님. 저 왜 아무것도 안 보이죠? 지금 여기 너무 어두워서 그렇죠? 혹시 정전된 건가요? 이따 전원이 들어오면 저 다시 보이는 거 맞죠?"
여의사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녀를 위로해주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세요. 제가 시력 검사 해드릴게요. 어쩌면 신경 압박으로 인한 일시적인 실명일 수도 있어요. 적극적으로 치료받으시면 꼭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민서희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감옥에 들어간 두 달 동안 그녀는 온갖 수모를 다 당했고 아이까지 잃었다. 지금은 실명까지 하여 앞을 볼 수 없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너무 절망적이였고 울먹이며 의사 선생님께 부탁했다. "선생님... 제발 제 두 눈 좀 치료해 주세요. 전 이제 모든 걸 잃었다고요!"
여의사 역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때때로 실망을 안겨다 주었고 현대 의학 기술로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퇴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제가 윗선에 신청해 볼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의사 선생님은 민서희의 어꺠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경찰을 찾으러 나갔다.
민서희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고 배를 어루만졌다. 안에 작은 생명이 들어있던 뱃속은 텅 비었고 박지환의 지시하에 결국 생명을 잃었다.
이 아이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아이였지만 민서희는 자신의 아이가 이런 식으로 생명을 잃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박지환의 요구에 응했고.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도대체 왜... 왜 박지환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줄 수 없었던 걸까? 왜 그녀의 진심을 바닥에 던져 잔인하게 짓밟아야만 했던 걸까!
민서희는 몸을 껴안고 울었고 그때 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 병실 문까지 더듬으며 걸어갔고. 문을 살짝 여니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왜 환자를 전문병원에 보낼 수 없는 거죠? 환자분 지금같은 상황에선 큰 병원으로 옮겨야만 살릴 가능성이 있다고요! 지금 한 사람의 두 눈이 당산들 손에 달려있다고요!"
"진연희.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환자가 저렇게 된 게 환자가 잘못해서라고 생각해? 그 분의 지시만 아니었어도 어떻게 감옥에서 저 지경까지 됐겠어? 지금 대중들도 겨우 화가 풀리고 여론도 잠잠해졌는데 다시 무슨 소동이라도 일으켜 봐. 그 누구에게도 좋을 점이 없어. 알겠니?"
"그럼 몰래라도 치료받게 하면 안될까요?"
"안돼." 남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또한 박 대표님 뜻이기도 해. 박 대표님을 건드린 대가이니 어쩔 수 없어."
박 대표님 뜻이기도 해. 박 대표님을 건드린 대가이니 어쩔 수 없어.
이 한 마디는 민서희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어둠도 마음속에 전해오는 차가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춥고 너무 아팠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고통스럽게 흐느껴 울었다.
박지환 씨. 저 너무 후회되요. 그때 왜 당신을 구했을까요?
제가 구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고 절 소중히 여길 줄 알았는데 이제와서 보니 제가 살린 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였네요!
"윤서아 씨!" 진연희는 문앞에 쪼그려있는 여자를 보고 잠시 당황하더니 황급히 앞으로 다가갔다.
민서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
"뭐라고요?"
민서희는 눈물을 쏟으며 애원했다. "전화 좀 빌려주시겠어요. 박지환 씨한테 전화 좀 해야겠어요. 왜 이토록 제게 잔인한 건지 물어봐야겠어요! 왜 절 그 정도로 증오하는 걸까요? 제가 대체 뭘 잘못했다구요!"
초점조차 없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로 가득했고 창백한 얼굴에는 쓸쓸함과 슬픔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렇게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나도 억울했다.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곧바로 민서희는 어떤 남자의 경멸적인 목소리를 들었다. "교통사고로 사람까지 죽여놓고 사형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거지. 이제와서 자신이 뭘 잘못했냐고 묻는 거야? 그럼 죽은 사람은 무슨 잘못했다고?"
"임지한 씨!" 진연희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눈빛을 주었고 휴대폰을 민서희의 손에 넣어주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윤서아 씨, 어쩌면 당신한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민서희는 멍하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그제서야 진연희는 민서희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떠올랐다. "죄송해요. 앞이 안 보인다는 거 잊었어요. 번호 얘기해 주세요. 제가 대신 걸어드릴게요."
민서희는 박지환의 번호를 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번호를 말하며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
민서희는 간절하게 전화를 받았고 전화 건너편에서 박지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박지환이 말을 마치자마자 곧이어 윤서아의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 씨. 이 드레스 어때요? 당신 양복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오늘 찍을 웨딩 사진 너무 잘 나올 것 같아요."
민서희의 표정은 곧바로 굳어버렸고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감옥에서 온갖 수모를 당했는데 박지환과 윤서아는 행복하게 웨딩 사진이나 찍고 있다고?
"너무 아름다워." 전화 건너편에 있는 박지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서아는 처음에는 환하게 웃다가 다시 후회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민서희 씨한테 너무 미안한 것 같아요. 저 대신 죄까지 뒤집어 쓰게 하고... 지환 씨. 다 제 잘못이에요. 아무리 두려워도 도망치지 말 걸 그랬어요."
"그 여자 얘기 꺼내지 마." 박지환의 말투에서 귀찮음을 들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그 여자 얘기는 왜 꺼내? 어차피 이미 감옥에 있잖아."
민서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절망으로 가득했다.
하긴. 박지환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죽음에 대헤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얼굴까지 망가뜨리고 자신의 아이까지 죽이라고 했겠는가?
실명은 말할 것도 없고 죽는다고 해도 박지환이 바라는 대로 된 것 뿐이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민서희는 화면이 검게 변한 휴대폰을 진연희에게 돌려주었다. 진연희는 민서희가 왜 전화에 대고 한 마디도 안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여자가 슬픔에 잠긴 상태에서 무표정으로 변하며 온몸에 절망으로 가득찬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나니
진연희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민서희는 입을 열었고 그녀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죄송하지만 다시 형을 치를 수 있게 감옥으로 보내주세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겠다구요?" 진연희는 잠깐 얼어붙었다. "하지만 환자분 눈이..."
"그냥 치료는 포기하겠어요." 민서희는 처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눈이 이렇게 된 벌이었다. 어리석게 박지환에게 첫 눈에 반한 벌. 눈이 멀어 이런 남자 곁에 2년 동안이나 멍청하게 곁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은 바로 이 두 눈 때문이었다.
박지환 씨, 제가 진 빚은 이렇게 다 갚네요.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 확실한 남남이에요!
...
6개월 후 감옥.
교도관은 감방 문을 열었고 한 치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 구석에 한 여자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여자의 몸은 악취로 가득했고 얼굴에는 흉터로 가득했으며 두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자 여자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교도관은 혐오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윤서아 나와. 이제부터 자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