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윤서아가 깨어났다
"안돼요! 지환 씨 안돼요! 제발요!"
박지환은 차갑게 웃으면 말했다. "안돼? 민서희, 지금 나랑 밀당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 정말 여우따로 없구나!"
그는 그녀의 애원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오히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는 그를 더 짜증나게 할 뿐이었다.
"지환 씨! ...아기요!"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 인정받을 수 없는 사생아일 뿐이야!"
박지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벌을 내리려 했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원했으며 가장 중요한 건 배 속의 아이를 이번 사고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지환 씨..."
민서희는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다.
"띠리링——"
갑자기 박지환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지환은 하던 짓을 멈추고 스피커 폰을 켜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한경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서아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박지환이 운전해서 떠날 때는 한창 새벽이었고. 전화를 받기부터 떠날 때까지 불과 1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박지환이 얼마나 조급했는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드디어 깨어났고 더 이상 역겨운 여자와 연기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민서희는 비참하게 옷을 챙겨 입었고 베란다 창문으로 사라지는 자동차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몹시 차가웠고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6년 전 한 번의 기부 행사에서 처음 본 박지환에게 그녀는 첫눈에 반해버렸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박지환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재 속에 갇혀있었는데 그녀는 목숨 걸고 안으로 뛰어들어 그를 구해주었다. 그는 혼수 상태에서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의식을 되찾으면 반드시 그녀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여 평생 잘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윤서아의 약혼자가 되었고 그녀는 윤서아의 대용품이 되어버렸다.
윤서아도 깨어났으니 대용품도 그만 물러날 시간이 되었다.
...
민서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잠에 들었고 새벽에 전화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구석구석 아픈 그녀는 몸을 쭈그린 채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고 박지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녀의 졸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전화온 걸 보면 용건은 분명했다. 다만 윤서아가 의식을 되찾은지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박지환은 이리 급하게 당장이라도 자신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것일까?
그녀가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전화는 다시 한 번 걸어왔고 민서희는 차마 감히 무시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박지환은 하찮은 말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돌아와."
"저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아요." 민서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피도 조금 흘렸고 여전히 배가 조금씩 아팠다. "조금만 쉬었다 몸 좀 나아지면 그때 이혼하면 안될까요?"
박지환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돌아와. 이혼하려는 거 아니야. 뱃속의 아이 건드리려는 것도 아니고."
박지환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민서희는 놀란 것 외에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박지환은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아이를 건드리려는 게 아니라면 이토록 급하게 그녀더러 돌아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라도 마음이 변한 건 아닌지 혹은 막상 윤서아가 깨어나고 보니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닌지. 그래서 직접 얼굴 보고 직접 얘기라도 나누려는 걸까?
민서희는 머릿속이 복잡했고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은 채 외투를 걸치고 차를 세워 떠났다.
그녀는 가는 도중에 내내 무슨 일이 벌어질까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별장에 들어선 후에야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알아차렸다.
박지환은 민서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찌푸렸던 이마를 살짝 피며 말했다. "사람 왔으니 어서 데려가 피 뽑으세요."
그녀의 피를 뽑으라고?
민서희가 미처 대체 무슨 상황인건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소파에 앉아있던 사람은 그녀의 팔목을 잡고 데려갔다.
"뭐하는 거예요?" 민서희는 격렬하게 반항했다.
박지환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민서희, 지금 서아가 출혈로 혼수 상태야. 반드시 수혈 받아야 해. 지금 당장 나랑 같이 3층에 가서 수혈해. 서아 살리는 시간을 낭비할 생각하지 말고!"
민서희는 멍하니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환 씨, 윤서아한테 수혈하라고 절 여기까지 부른 거예요?"
"무슨 기대를 하고 온 거야?" 박지환은 경멸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네가 보고 싶어서 이른 아침부터 불렀을 것 같아?"
민서희의 얼굴은 새햐얗게 질렸고 그제서야 오는 내내 품었던 헛된 망상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깨달았다.
"저 임신했다고요. 절 여기까지 부를 시간에 병원에서 혈액을 구하면 되잖아요? 굳이 임산부더러 수혈하라고 해야겠어요?" 민서희는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지환 씨, 정말 제가 죽길 바라는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네가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박지환은 그녀가 종일 죽음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을 가장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민서희의 배를 흘끗 쳐다보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나도 수혈하라고 강요하진 않을게.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만 협조하지 않는다면 네 뱃속의 아이는 내일까지 버티지 못하게 될 거야."
민서희는 온몸이 차갑게 변했지만 차마 반항할 수 없어 강제로 3층으로 끌려갔다.
그녀가 이 공간에 들어온 것은 2년 만에 처음이었다. 강제로 헌혈하러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강제로 침대에 눕혀졌고 그녀는 옆 침대에 누워있는 윤서아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윤서아와 80% 정도 비슷하게 생겼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옆에 누워있는 윤서아는 자신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쌍둥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똑같은 외모에도 박지환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윤서아를 향해 있었다. 민서희는 두 눈으로 직접 차갑게 얼어있던 박지환의 표정이 따스한 봄날처럼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윤서아에게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주며 의사에게 얘기했다. "우리 서아 더 이상 고생하지 않게 피 많이 뽑아주세요."
갑자기 현기증이 나며 민서희의 눈앞은 시커매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 힘이 없어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지환은 잔인하게도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차라리 죽길 바랐다.
"민서희 씨 맞죠?"
갑자기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서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윤서아는 이미 의식을 되찾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윤서아는 매우 차갑고 우아한 기질을 풍겼다. 똑같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풍기는 아우라는 전혀 달랐다. 딱 봐도 남자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공주로 태어난 여주인공 같았다.
"윤... 윤서아 씨..." 민서희는 입술을 벌렸다. 바짝 마른 입술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마다 아팠다. 윤서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심경은 복잡했다.
질투라고 하자니 사실 질투도 아니였다. 그녀는 윤서아를 질투할 자격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질투보다는 부러움이 더 많았다. 박지환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이 여자가 부러웠다.
윤서아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어려워할 거 없어요. 그냥 편하게 서아라고 부르시면 되요. 지환 씨도 늘 그렇게 불렀거든요. 그 사람이 저 때문에 서희 씨한테 꽤 많은 폐를 끼쳤죠? 2년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라고 할 건 없어요." 민서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서아의 여유로운 모습에 그녀는 자신이 더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저랑 박 선생님은 서로 이용하는 사이일 뿐인걸요."
"그래요." 윤서아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모르게 시선은 민서희의 배를 향했다. "서로 이용한다면서 지환 씨 침대에까지 오르셨나 봐요?"
민서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시같은 말을 내뱉고 윤서아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서희 씨, 물 한 잔만 건네줄 수 있나요?"
"좋아요."
금방 수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서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억지로 몸을 겨누며 테이블에 놓여있는 차 잔을 윤서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윤서아가 갑자기 잔을 뒤엎으며 소리쳤다. "아악! 뜨거워!"
펄펄 끓던 뜨거운 물은 민서희의 손등에 엎어졌고 너무 아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윤서아가 왜 소리를 질렀는지 사태 파악하기도 전에 어떤 그림자가 방안으로 뛰쳐들어왔다.
"민서희, 죽고 싶어!"
어떤 강한 힘이 그녀를 바닥으로 밀쳤고 민서희가 고개를 들어 박지환을 얼굴을 확인했을 때 윤서아는 이미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듯한 박지환은 윤서아를 손에 감싸며 지켜주고 싶었다.
윤서아는 두 눈이 빨개진 채로 설명했다. "괜찮아요. 지환 씨, 서희 씨, 아마 제가 깨어난 걸 보고 본인 자리를 빼앗길 까봐 제게 겁을 주고 싶었나 봐요... 사실 괜한 걱정이에요. 지환 씨가 서희 씨한테 마음이 생겼다면 저도 뻔뻔하게 여기 남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내가 저 여자를 선택할 리가 있겠어?" 박지환은 화난 표정으로 민서희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말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나한테 저 여자는 그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