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안시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슨 사람 눈이 X레이도 아니고 어떻게 벽 뒤에 있는 그녀를 알아차렸을까.
안시연이 남자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뒤돌아 도망치려던 찰나 바닥에 나타난 짧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희미한 불빛을 내뿜는 램프가 자신의 바로 위를 비추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문 앞에 서서 박성준을 감히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난...”
안시연은 괜히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서재에 불이 켜져 있길래 그쪽이 있는 건지 확인하려고 봤어요.”
“난 여기 살아.”
안시연은 화들짝 놀랐다.
“방 하나에 침대가 하나뿐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홀연히 방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아이가 지켜줄 테니 같이 살아도 상관없을 거다.
안시연은 옷을 정리한 뒤 책을 들고 창가 소파에 앉아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몇 페이지를 읽지도 못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안시연, 너 이제 겨우 22살인데 무슨 결혼을 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안시연은 손이 저릴 정도로 진동하는 휴대폰을 보며 이미 전희진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전희진이 화를 내든 말든 스피커 모드로 돌리고 소파에 놓았다.
“넌 아직 학생인데 무슨 아내 노릇을 한다는 거야? 기가 막혀. 우리 부모님도 지금 미치기 직전이야. 졸업하고 네 능력으로 원하는 사람 충분히 만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아랫도리 간수 못 하는 남자한테 잡혀 살고 싶어?”
전희진은 한바탕 쏘아붙이다가 목을 축이기 위해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안시연, 지금 당장 이혼해. 그 남자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희진아, 그 사람은 아이 아빠야. 엄마 병원비도 대주고 VIP 병실로 바꿔주기까지 했어. 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전희진은 당황했다.
안가인의 병원비가 얼마나 비싼데 그걸 감당한다는 건 분명 늙고 못생긴 남자인 게 분명했다.
안시연이 얼마나 예쁜데 그런 남자에게 시집간단 말인가!
화가 나서 속이 뒤틀릴 지경이지만 전희진은 그래도 이성이 남아 있었다.
현실이 그러했다.
안시연에게 돈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남자와 결혼해서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안시연도 노력했다. 하루에 3, 4시간밖에 못 자고 공부하는 와중에도 여러 아르바이트에 전전했지만 여전히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안시연처럼 착한 사람은 더더욱 그런 짓을 못 한다.
안시연의 선택이 잘못된 거라 비난해도 그녀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나?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안시연을 나무랄 권리가 없었다. 해준 건 없으면서 입만 나불대는 짓이었다.
지금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말고는 정말 더 좋은 해결책이 없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고 안가인의 병원비도 부담할 수 있으니까.
안시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그녀의 사랑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전희진은 이를 악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연아.”
안시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희진을 달래는 동시에 스스로 되뇌었다.
“응, 맞아.”
“시간 나면 너 보러 갈게. 요 며칠 야근하느라 너무 바빠서 아직 퇴근도 못했어. 흑흑...”
전희진이 투덜거리며 우는소리를 했다.
“우리 대표 너무 변태 같아. 자기가 야근하면 회사 직원 전체가 야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 인턴치고 월급이 높지만 월급 올라가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게 생겼어. 번 돈도 다 못 쓰고 죽겠네.”
“맞아. 악덕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착취할 생각만 하지. 변호사가 될 너도 피할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하겠어.”
안시연이 거들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너희 대표는 사람도 아니야.”
“문제는 야근도 부질없다는 거야. 상사가 퇴근하지 못하게 하니까 억지로 바쁜 척하는 거지.”
“뭐? 진짜야?”
안시연은 경악했다.
“너희 상사도 너무한다. 너희 대표만큼이나 지독해.”
“그러니까 말이야. 인턴 기간만 끝나면 절대 장풍 그룹에 남지 않을 거야.”
안시연은 책에 줄을 그으며 전희진과 함께 장풍 대표와 상사를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방으로 돌아온 박성준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박성준은 장풍 그룹이란 말에 걸음이 멈칫하며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들어보니 안시연은 회사 프로젝트 얘기가 아닌 통화 상대와 장풍 그룹 대표, 그러니까 박성준 그를 욕하고 있었다.
회사 상사들이 그가 야근한다고 직원들을 야근시킨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평소 퇴근할 때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지하로 내려가 반대편 출구로 나가기에 회사 내부 상황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안시연은 박성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희진아, 나 먼저 끊을게.”
전희진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켜진 휴대폰 화면에는 이미 밤 10시가 넘은 게 보였다.
박성준은 아마도 잠을 자러 돌아온 게 분명했다.
“바로 정리할게요.”
샤워하면서 양치까지 마쳤기에 박성준이 양치질을 하는 동안 안시연은 소파에서 책을 접고 내일 계획까지 정리해 놓았다. 이러면 아침에 일어나도 한가해질 걱정이 없었다.
아르바이트하지 않아도 되니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고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정리를 마친 그녀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플래너가 눈에 보였다.
그녀의 수업 일정과 함께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는 플래너였다.
하루 세 끼 식사, 매일 요가 트레이닝, 임신 상담 및 육아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주일 내내 꽉 찬 일정이 수업 틈틈이 준비되어 있어 저녁과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엄마와 함께 보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안시연은 일정표를 보며 몸이 살짝 떨렸다.
화장실 문이 열리며 바디워시 우드 향이 공기 중에 퍼지자 안시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대표님, 전 이 일정대로 살 수 없어요.”
박성준이 어두운 눈빛으로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더니 재차 강조했다.
“안시연, 너와 나는 계약 결혼이며 서로 동업 관계일 뿐이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내가 그에 상응한 보수를 주지.”
안시연은 난감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성준의 말은 따끔한 일침과도 같았고 안시연은 현실을 직시했다.
조영훈과 계약서에 사인을 한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박성준의 것이었다.
존중도 없고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거절할 권리도 없었으며 협조하지 않으면 엄마로 협박했다.
무력감이 가슴 끝으로 퍼져나가며 안시연은 이익을 주고받는 결혼 생활이 어떤 의미인지 절실히 느꼈다.
오직 서로 주고받는 이득만 있을 뿐 감정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말 못 할 감정이 들어찼다.
엄마의 병원비를 해결했다는 안도감, 아이를 지켰다는 기쁨,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서 행복한 동시에 자아를 잃어버린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는 고집스럽게 창문을 응시했다.
방의 불이 하나씩 꺼지고 침대 뒤쪽 자리가 푹 꺼져 들어가더니 마지막 불이 꺼지면서 방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요한 방안에 창밖으로 물이 졸졸 흘리는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들렸다.
“이쪽으로 와.”
박성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박성준은 강요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그녀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