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안시연은 박성준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 줄 알고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두려움에 이불을 꼭 껴안고 그를 향해 협박했다.
“저... 임신했어요!”
박성준은 눈에 띄게 멈칫했다.
‘내가 그런 짐승으로 보이나?’
그날 밤 약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아무 여자나 찾아서 해소하진 않았을 거다.
남자는 이불 속에 파묻힌 작은 체구의 여자를 보며 설명했다.
“너무 멀리 있으면 가운데가 비어서 추워.”
안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창피했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 중앙으로 다가가 손으로 둘 사이 이불을 꾹 눌렀다.
그전까지 바쁘게 살면서 푹 잔 적이 없었던 그녀는 이렇게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도 드문 일이었고,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물소리에 안시연은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뒤에서 박성준은 자신 때문에 직원들이 억지로 야근한다는 걸 기억해 뒀다가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 절대적으로 야근을 근절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비즈니스 세계에선 서로 이득을 취해야 했다. 장풍 그룹의 기업 문화가 그저 형식에만 그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
연말이라 이제 그도 슬슬 내부 감찰을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일정을 정리한 박성준도 금세 잠이 들었다.
고요한 공간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밤잠을 푹 잔 안시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실로 편안하게 잠을 잔 게 오랜만이라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남자가 곁에 있어서인지 손발이 찬 그녀가 웬일로 따뜻함을 느꼈다.
뒤에서 아직 자는 박성준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이불속에서 저린 손을 꼬물거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방 양쪽에 창문이 있었는데 박성준이 있는 쪽 창문은 개울을 마주해 있었고 그녀 옆 창문은 거인들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불구불한 언덕이 있었다.
그 시각 산 뒤편에서 황금빛 테두리가 삐져나오며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황홀했다.
침대에 누워 창문 변두리로 사라지는 불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안개가 흩어졌다.
빛이 들어온 방 안에는 떠도는 먼지가 살짝 보였다.
살면서 처음 보는 일출이라 아침에 요가 수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시연은 기분이 좋았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박성준이 잠에서 깨자 안시연은 곧바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눈을 감으면 사람의 감각이 특히 예민해지는데 그녀는 박성준의 움직임을 다 파악했다.
씻으러 들어갔던 박성준이 침대 옆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 끝 벤치에 파자마를 올려놓은 뒤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눈을 뜬 안시연은 그제야 몸에 힘이 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박성준에겐 태생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있어 어떻게든 그를 피해 다니며 부딪히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늘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녀가 한참을 뒤척이다 내려와 보니 박성준은 여전히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계단 앞에 서서 우선 산책이라도 할까, 아니면 구석에 가서 박성준을 피해 있을까 고민했다.
“사모님. 아침 식사 금방 준비해 드릴 테니까 식탁에서 기다리세요.”
“아, 네.”
최미숙의 말에 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박성준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원탁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박성준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고 그녀는 주방을 둘러보며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최미숙이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사모님, 적당히 만들었어요. 요가 수업 끝나고 더 준비해 드릴게요. 이건 엽산인데 임신 중에 꼭 보충해 줘야 해요.”
“네.”
대답한 그녀가 천천히 씹으며 시간을 끌었다.
“도련님, 사모님.”
안시연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요가 강사 메리라는 것을 알았다.
“네.”
박성준은 대답하고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시연은 어릴 적부터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요가 수업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없었고 팔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데다 음악 재능도 없었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녀는 메리의 동작을 따라 하느라 애를 먹었다.
개울가나 푸른 식물 주변에서 요가 수련을 하는 편안함을 느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요가 수업 자체가 그녀에겐 지옥이었다.
메리는 시범을 보이고 동작을 시정해 주면서도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게 계속 주시해야 했기에 무척 바삐 맴돌았다.
임신 중 요가가 태아 발달에 도움이 되고 불편함을 덜어준다는 메리의 말과 부드럽고 인내심이 많은 선생님의 모습에 그녀는 요가를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음, 몸매는 괜찮네. 근데 외모가...”
평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얌전하게 생겼네.”
상대의 시선과 말투가 안시연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똑같은 시선으로 앞사람을 바라보았다.
찾아온 사람은 관리를 아주 잘한 40대로 보였다.
6대 4로 가르마를 나누고 머리를 올렸는데 눈매가 박현석을 닮았다.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이었지만 무척 비싸 보였다.
최미숙은 그녀가 가만히 있자 나서서 소개했다.
“아가씨, 이쪽은 도련님 아내 되는 안시연 씨입니다.”
“쳇, 아빠도 나이가 들긴 했네. 도우미 주제 감히 내 앞에서 거들먹거려? 우리 아빠는 노안이 온 것도 모자라 이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최미숙이 굴하지 않고 말했다.
“도련님께서 저에게 사모님을 곁에서 챙기라고 했습니다. 백진 씨와 어르신도 동의했습니다.”
도발 당한 것 같은 느낌에 박민정이 이를 갈았다.
“왜, 내가 시집갔다고 너 하나 어떻게 못 할까 봐?”
말하며 그녀가 손을 들어 최미숙을 때리려 했다.
“성이진 씨!”
안시연이 소리치자 성이진이 앞으로 달려가 최미숙의 얼굴에 내리치려는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을 놓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희도 도련님과 어르신 명령에 따라 사모님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쳇!”
박민정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안시연을 노려보더니 이 일을 속에 담아두었다.
어젯밤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오늘 찾아온 것인데, 오고 나서야 박성준의 아내를 데리고 옷을 사러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얌전해 보이기는 하는데 지나치게 단정해 보였다.
단발머리에 남자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가녀린 몸매가 망할 불여우 은가영과 똑 닮았다.
“됐어, 고모로서 내가 그냥 넘어갈게. 네 할아버지가 너한테 옷 사주라고 했어. 나랑 가자.”
‘고모? 박성준의 고모인가.’
안시연은 마음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을 돌려도 조금 더 그럴듯한 핑계를 찾아야지.
“제가 수업하러 가야 해서 시간이 없네요.”
“넌 이제 박씨 가문 사람인데 그럴듯한 옷이라도 챙겨 입어야지. 다른 사람들이 거지라고 오해하면 우리 집안 망신이야.”
안시연은 어렸을 때부터 옷은 반듯하게 입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상대의 말도 일리가 있어 거절하지 않았다.
“네, 옷 갈아입고 같이 가요.”
박민정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럼 서둘러.”
박성준의 아내가 제법 흥미로웠다. 은가영이 사라진 후 한동안 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