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안시연은 박현석의 말에 깜짝 놀랐다. 박성준이 그녀를 데려다준다니, 감히 바라지도 못할 일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박성준은 화를 내지 않아도 태생적인 압박감을 뿜어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숨이 막히고 무의식적으로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졌다.
특히 두 눈이 그녀를 바라볼 때면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할아버님, 저녁에 있는 실험 수업은 두 시간이라 조금 길어요.”
안시연이 살짝 몸을 돌려 박현석을 마주했다.
“조금 전 할아버님도 대표님 바쁘다고 하셨잖아요. 전 성이진 씨가 데려다주면 돼요.”
박현석은 멈칫했다. 조금 전 그의 입으로 손자가 바쁘다고 했는데 안시연이 그 말 그대로 반박할 줄이야.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고기를 씹고 있던 박성준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성가신 일이 줄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지평선의 주황빛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는데 그 빛줄기가 꼭 삶의 희망 같았다.
차창 밖으로 노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안시연은 과거 노을을 따라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사모님, 차가 학교 안까지 못 들어가네요. 여기가 실험 청사와 제일 가까운 문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늘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정중하게 선을 그었다.
안시연과 성이진이 나란히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데 한 명은 후드에 청바지를 입고 다른 한 명은 정장에다 구두를 신은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주변 학생들이 이따금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안시연은 시선의 중심이 되는 것이 싫었는지 에코백 가방끈을 꽉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실험실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강의실에는 미리 온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전부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인데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전공이라도 기숙사에 있는 세 명과 과대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르는 사람이었다.
몇몇은 모델 앞에서 혈 자리와 경락의 흐름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일부는 혈 자리 위치를 외우고 있으며 일부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주변 학생들에게 가끔 말을 건넸다.
안시연은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아서 침구학 교재의 목차를 보며 내용을 떠올리다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책을 뒤적거려 복습했다.
기성의대는 의료계 전문가 80%가 모두 이곳 출신일 정도로 의료 분야에서 국내 최고 학교였다.
여러 의대에서 사용하는 전공책마저 이 학교 교수들이 쓴 것이었다.
동서 의학 지식을 고루 갖춘 의사를 배양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여러 수업을 개방해 교양으로 내놓았다.
안시연은 임상 의학과를 전공했지만 한의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주요 과목을 모두 수강했다.
점점 교실이 붐비기 시작했고 안시연 주변의 빈자리가 가득 채워졌다.
시끄러웠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안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한 사람이 단상에 서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소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로 연단에 서 있는 그 사람은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실험 수업은 저 은유빈이 여러분과 함께 진행할 겁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겸손하고 예의 바른 말투가 봄바람처럼 편안한 기분을 선사했다.
“우와!”
우렁찬 박수와 함께 학생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게 안시연은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은씨 가문의 전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은유빈은 한의사 집안 출신으로 다섯 살 때부터 냄새로 약재를 구분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한 한의사 대가였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 은시덕은 국내 제1세대 한의사 중 으뜸으로 세계 각국의 칭송을 받고 있다.
은씨 가문에는 중강당이라는 100년 전통의 한의원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는 건 한의사로서 궁극적인 목표이자 긍지였다.
은유빈이 손을 들자 강의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께 알려드릴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강당은 올해 학교에서 한의학, 서의학, 동서 의학에 흥미가 있는 학생 세 명을 초대해 한의원에서 선생님들에게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데 선생님으로는 은시덕, 은산옥...”
은유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은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은시덕 선생님이라니... 세상에, 선생님을 만나면 얼마나 기쁠까?”
“은산옥 선생님은 지금 휴가 기간 아니야? 그래도 학생을 받다니, 역시 우리 학장님이야.”
“대단한 분들을 뵙는 기회인데 열심히 해서 꼭 갈 거야.”
“생각해 보면 전공마다 한 명만 데려간다는 거잖아. 경쟁률이 치열할 텐데?”
은유빈은 자기 말이 끊긴 것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활짝 웃으며 학생들의 토론을 듣고 있었다.
소리가 점차 잦아들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번 학기말 시험에서 성적이 과 3위 안에 들고 결석이나 F 학점이 없으면 면접에서 우선권을 가집니다.”
은유빈의 말에 단상 아래에선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합격률이 너무 낮아요.”
“게다가 면접이라니, 전공 지식을 그냥 머릿속에 다 넣으라는 소리잖아요.”
은유빈이 학생들을 격려했다.
“아직 겨울방학까지 두 달 넘게 남았으니 최선을 다해봐요. 그럼 오늘 실험 수업을 시작할게요. 수업 전에 이미 모델로 혈 자리를 공부하는 학생이 있던데 그건 원유이가...”
은유빈이 수업을 시작하자 학생들은 토론을 멈추고 수업에 집중했다.
안시연은 귀로 강의를 듣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실습 기회를 꼭 따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산옥은 기성의대 학장일 뿐 아니라 간 전문의였지만 오랫동안 중강당 말고 다른 곳에서 진료를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만나 엄마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동서 의학을 병행해 엄마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안시연이 교실 문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이진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러셔도 돼요. 저쪽에 의자가 있으니까 가서 쉬어요.”
“사모님, 이건 도련님 지시입니다.”
한 치도 떨어지지 말고 밀착 경호를 하라는 박성준의 명령이었다.
안시연은 박성준의 결정이라면 거부할 권리도, 간섭할 권리도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에 앉아 안시연이 시간을 확인하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전희진이 이미 퇴근했을 거란 생각에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희진아, 나 예약한 수술 취소했어. 오늘 오전에 아기 아빠랑 혼인신고도 마쳤어.]
메시지가 전송되자 그녀는 양손으로 휴대폰을 꽉 움켜쥐고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더욱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전희진의 성격상 한바탕 욕설을 퍼부을 게 분명했다.
휴대폰 화면이 알아서 꺼질 때까지 전희진이 답장을 보내지 않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하루하루가 야근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지금 인턴이었다.
우연한 임신으로 박성준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런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안시연의 마음은 조금 복잡해졌다. 남자가 키우는 애완동물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수선정으로 돌아오니 숲속의 작은 건물이 따뜻한 색의 불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우선 샤워를 하고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다.
수습을 결심했으니 전공인 임상 의학과 외에 한의학 전공에 관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특히 한의학 4대 고전은 반드시 숙지해서 면접에서 선생님들께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
샤워를 마친 안시연이 짐 정리를 하는데 옷장 안에 있는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에 세면도구도 두 세트가 있는 것을 보며 의아했는데 옷장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남자 옷들을 보며 박성준도 여기서 살게 될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조심스럽게 벽에 몸을 밀착해 불이 켜진 다른 방으로 다가갔다.
안시연이 문 앞에 다가가자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비슷한 미세한 움직임이 들렸다.
박성준이 그곳에 있었다.
이를 깨달은 안시연의 마음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몰래 뭐 하는 거야?”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다소 엄숙하게 들려왔다.
박성준은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벌써 못 참고 저러는 건가?’
안시연 배후에 있는 자가 안달이 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