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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지폐는 꽤 두둑했고, 얼핏 봐도 몇십만 원은 넘는 것 같았다. 빗자루를 꽉 움켜쥐자 손톱이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고작 밀크티 한 잔에 이렇게 많은 돈을 주다니, 역시 씀씀이가 남달랐다. 게다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제일 위에 있는 지폐에 마른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어젯밤 외출하기 전에 내가 두고 간 돈인데 고깃집에서 받은 알바비였다. 정산하기 전에 한눈팔다가 깨진 술병에 손이 베어서 피가 흘러나왔고 돈을 건네받을 때 아직 지혈이 안 되어서 지폐에 조금 묻었다. 나는 강주호가 괜히 걱정할까 봐 대충 밴드로 상처를 감싸고 장갑을 낀 채 집으로 돌아갔다. 정작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생일 축하 겸 저녁 식사를 마무리한 다음 생활비가 떨어졌다는 말을 넌지시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친’을 위해 밀크티를 사다 주면 받는 팁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저 사람이 강주호의 여자 친구라면 나는 대체 뭐란 말이지? ‘기껏해야 심심풀이 땅콩 아니면 장난감이겠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칼로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묵묵히 돈다발을 건네받아 뒤돌아서 룸을 나섰다. 밖에 소낙비가 내렸지만 우산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비바람이 휘몰아쳐서 큰 의미는 없었다. 밀크티를 들고 룸에 돌아왔을 때 마치 물에 빠진 생쥐처럼 몰골이 초라했다. 이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하신 밀크티요.” 강주호는 흠칫 놀라더니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내가 맞는지 확신이 없는 듯싶었다. 반면, 허가람은 빗물이 맺힌 밀크티에 시선을 돌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 식었네. 게다가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아서 마시기 싫어졌어.” 강주호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럼 버려.” 그리고 밀크티를 휴지통에 버리고 무심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이만 가 봐요.”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뒤돌아서 룸을 나섰다. 비를 맞아서인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다른 룸까지 청소하고 나니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새벽 4시가 되어 비로소 퇴근했다. 비는 그쳤지만 찬 바람이 쌩쌩 불어 뼈가 시릴 정도였다. 결국 비틀거리며 클럽에서 걸어 나와 두통을 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강주호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의 소원대로 전부 까밝히고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핑 돌면서 시야마저 점점 흐려졌다. 빵! 빵! 이때, 귀를 찌르는 경적이 울려 퍼졌고 나를 향해 곧장 달려오는 차량을 발견했다.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섰지만 발목을 삐끗하는 바람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현기증은 더욱 심해졌고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이 다가오는 듯싶더니 눈앞에 캄캄해지면서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다행히 발목은 크게 다치지 않았어요. 단지 열이 나고 저혈당이 심한 편인데 아마도 영양실조에 걸려서...”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매력적인 중저음이 울려 퍼졌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왠지 모르게 귀에 익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려고 애를 쓰던 찰나 차가운 손바닥이 이마에 살포시 닿았고, 소매에서 풍기는 은은한 우드 향 때문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볼을 비비적거렸다. 하지만 상대방은 움찔하더니 천천히 팔을 내렸다. 이내 눈을 번쩍 떠졌다. 앞에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넋이 나간 채 머리까지 하얘졌다. ‘주현수가 여긴 웬일이지?’ 기억을 되짚어보면 주현수는 항상 흰 셔츠를 입고 다녔고, 카리스마가 넘쳤을뿐더러 외모도 잘생겼고 단지 성격이 쌀쌀맞은 편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진중한 느낌이 더해졌고 블랙 슈트를 차려입은 모습은 지적이면서 고급스러웠다. 오뚝한 콧대에 걸친 무테안경, 이목구비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조각상처럼 정교했지만 기세만큼은 더욱 위압적으로 변했다. 병상 옆에 앉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입만 벙긋하며 한참이 지나서야 한 마디 쥐어짜 냈다. “도련님...” 주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이제 오빠도 몰라보는 거야?” 설령 지금은 의붓남매가 되었을지언정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본인도 원치 않을 테니까 피차일반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는 주씨 가문 가정부로 일했다. 엄마 손을 잡고 처음 대면하게 된 날, 도련님이라는 소개와 함께 방해되지 않도록 옆에서 얌전히 혼자 놀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래서 조심조심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며 피아노를 연습하고, 그림을 그리고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물론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주현수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무슨, 그냥 현수 오빠라고 불러.” 게다가 나를 유난히 잘 챙겨줬다. 고작 가정부의 딸에 불과한데 피아노도 가르쳐주고 숙제도 같이해주며 여기저기 놀러 다니거나 몰래 사탕을 사주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허황한 꿈을 꾼 적도 있지만 엄청난 신분 격차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씨 가문에 비하면 강씨 가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엘시의 모든 산업과 부동산을 독점한 일가로서 네트워크, 전자상거래 분야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녔다. 주씨 가문의 외동인 주현수는 가히 이 시대의 진정한 ‘황태자’라고 칭할 수 있다. 당시 처음으로 신세 한탄하며 도박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품기도 했다. 만약 내가 부잣집 딸이었다면 주현수를 좋아할 자격이 주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소원을 이루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느 날 연회에서 엄마는 주현수의 아빠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으로 몰래 들어갔고, 그렇게 사모님의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다. 그 이후로 주현수는 절대 오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설령 남매가 되었을지언정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매정함과 혐오감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가정부의 딸 주제에, 너도 엄마처럼 남자한테 빌붙으려고 일부러 접근한 거야?”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씨 가문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그래도 초반에 용돈을 챙겨주었지만 나중에는 딸이 있다는 것도 잊고 주씨 가문의 비위를 맞춰주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는 내가 강주호의 입에 발린 소리에 넘어간 제일 큰 이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싸늘한 눈동자를 마주쳤고, 나는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일개 가정부의 딸로서 어찌 감히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나를 쳐다보는 주현수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병원에는 무슨 일이죠?” 주현수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어떤 행인이 도로에 쓰러진 너를 발견하고 휴대폰에서 어머님의 연락처를 찾아냈어. 지금은 이엘시에 안 계셔서 나한테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라.” 이 말을 듣자 고개가 저절로 내려갔다. 우리 모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이 흔쾌히 승낙했다는 자체가 의외였다. “도련님,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바쁘실 텐데 먼저 가보셔도 돼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현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남자 친구는 어디 있어? 돌봐주러 안 온대?” 나는 얼떨떨한 채 무의식중으로 되물었다. “강주호를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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