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3장

주현수는 피식 웃으며 은근히 비꼬았다. “어쩌다 그런 쓰레기한테 정을 주게 되었어?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스럽군. 호기롭게 집을 나갈 때는 언제이고, 어중간한 녀석에게 감쪽같이 속아 환상에 빠져서 살았던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머리가 띵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강주호와 무슨 관계인지 알고 있었다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둘 다 명문가 자제로서 서로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다시 말해서 주현수는 여태껏 한발 물러나 구경만 했다는 뜻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마도 초라한 내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겠지? 주현수는 어디까지나 엄마처럼 남자의 덕이나 보려고 혈안인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강주호도 내가 신분을 미리 파악하고 나서 대시했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컸다. 비록 화가 나서 몸이 떨릴 지경이지만 딱히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어차피 남남이라 도와줄 의무는 없지 않은가? “내가 멍청하든 말든 도련님이 알 바 아니죠.” 쌀쌀맞은 말투와 달리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만약 비꼬려고 찾아온 거라면...”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현수는 허리를 숙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피하려고 했지만 손목이 붙잡히는 바람에 옴짝달싹 못했다. “내가 그 정도로 한가한 사람 같아? 다만 오빠로서 여동생의 궁상맞은 꼴을 보니 창피한 건 사실이야. 이참에 집으로 돌아와. 적어도 광대처럼 놀림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곧이어 그의 손을 뿌리치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 하든 신경 끄시죠?” 주현수는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직도 고집부릴 거야?” 나는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손톱은 어느새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니요. 엄마가 사모님이 되었다고 해서 나까지 가족으로 끌어들일 생각하지 마세요. 대체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왈가불가하는 거죠? 피곤하니까 이만 가주시겠어요? 병원비는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주현수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그러고 나서 내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페이스 아이디로 잠금을 해제하고 자기 카톡을 추가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잽싸게 낚아챘다. “뭐 하는 거예요?” 주현수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돈 갚는다며? 적어도 카톡은 추가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 명세서도 못 받았는데.” 결국 말문이 막힌 나머지 휴대폰을 내려놓고 뻘쭘한 얼굴로 대답했다. “금액 확인하는 대로 이체할게요.” 주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 병실을 나섰다. 그가 떠나자마자 나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고, 문득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파텍 필립 시계를 발견했다. 주현수의 시계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꼼꼼하기로 소문 난 사람이 대체 웬일이지? 시계를 가져가라고 카톡을 보냈지만 상대방은 묵묵부답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잘 챙겨둘 수밖에 없었다. 워낙 비싼 물건이라 만에 하나 잃어버리면 배상할 엄두도 못 냈다.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이 좀 더 필요했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서 점심이 되어 퇴원했다. 그리고 명세서에 적힌 액수를 주현수에게 이체해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강주호는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어디 갔어? 알바를 밤새 하는 거야?”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친구들 앞에서 첫사랑을 여자 친구 취급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단 1초라도 말을 섞기 싫은 나머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네 알 바 아니야. 우리 헤어져.” 강주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흔쾌히 승낙할 줄 알았는데 내 손을 붙잡고 되물었다. “왜? 내가 돈이 없어서 같이 있기 싫은 거야?” 그러고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서은아! 너도 결국에는 허영심만 가득한 여자였네. 그동안...”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따귀를 날렸다.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거로 생각했어? 강주호 도련님?” 강주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어제 받은 돈뭉치를 꺼내 싸늘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흩날리는 지폐 사이로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은 또 헤어지기 싫어? 어젯밤만 해도 장난에 불과하다며 널 만날 자격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물기와 핏자국으로 얼룩진 지폐를 보는 순간 강주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어제 그 종업원이 너였어?” 나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응. 인심이 넉넉한 도련님 덕분에 밀크티 한 잔 사다 주고 팁으로 한 달 치 알바비를 벌게 되었네?” 강주호는 주먹을 움켜쥐고 묵묵부답했다.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 가방을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계약한 집이지만 한시라도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짐이 워낙 단출해서 캐리어 두 개로도 충분했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주현수가 두고 간 파텍 필립 시계를 들고 있는 강주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낀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거 뭐야? 너한테 왜 이렇게 비싼 물건이 있지? 누구한테서 받았는지 얘기해!” 속으로는 강주호가 미쳤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너한테 대답해줄 의무라도 있어?” 그는 새빨개진 눈으로 윽박질렀다. “남자 친구로서 물어보는 거야! 난 헤어지자고 동의한 적 없어.” 바닥에 널브러진 지폐를 보자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렸다. “만약 내가 여자 친구라면 어제 봤던 그 사람은 누군데? 남이 준 신발은 애지중지하고 정작 여자 친구의 선물은 휴지통에 버렸잖아. 그동안 너의 마음을 의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가족이 되어주겠다는 말도 철석같이 믿었더니 우리의 연애가 고작 게임에 불과한 거였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남자 친구라고 자부할 수 있지?” 강주호의 가슴이 들썩거렸고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더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의 손에서 시계를 낚아챘다. “지금까지 쓴 돈은 정리해서 보내줄게. 최대한 빨리 갚아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고소할 테니까.” 강주호 같은 사람은 미련을 갖는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물론 오랫동안 희생해온 과거를 돌이켜보면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오로지 강주호의 편의를 위해 일부러 역세권으로 집을 알아봤는데 덕분에 거리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운전기사가 정차하고 물었다. “손님, 어디로 가시나요?” 기사의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지? 그동안 강주호가 내 삶의 전부였고, 집을 떠난 이상 과연 갈 곳이 있을까? 냉혹한 현실 앞에서 괜스레 마음이 씁쓸했다. “가장 멀리 떨어진 호텔로 가주세요.” 나는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었다. 최대한 멀리 떠나 강주호라는 인간쓰레기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올라타려는 순간 강주호가 빨개진 눈으로 쫓아 나왔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짐을 옮기는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사람을 가지고 놀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들통나니 당황한 모습이라...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