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장

가정 형편이 어려운 남자 친구가 대학교 3학년부터 대학원에 다닐 동안 나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갖은 알바를 했다. 오로지 가족이 되어주겠다는 말 한마디만 믿고 무사히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럽에서 청소하다가 친구들의 대화를 엿듣고 나서야 그가 강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단지 어드벤처라는 게임에 져서 벌칙으로 나랑 사귀었다고 했다. 첫사랑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녕 나한테는 국물도 없었다. 그에게 난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했고, 기껏해야 인성을 테스트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심지어 5년을 함께한 것도 게임 룰 때문에 헤어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진실을 알고 나서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고 먼저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그는 밤낮으로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며 되레 애원했다. “은아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다시 돌아와줘!” ... 새벽 1시 3분, 밀크티 가게에서 알바를 마치고 나서 폭우를 뚫고 클럽으로 뛰어갔다. 매니저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왜 또 늦었어? 이번 달에 벌써 몇 번이나 지각했는지 알아? 계속 일할 마음은 있는 거야? 없으면 지금이라도 관둬!” 나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나지막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꼭 시간 지킬게요.” 곧이어 거친 욕설이 들려왔고 한참이 지나서야 쌀쌀맞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라가서 6번 룸 청소해. 안에 계신 손님은 부잣집 자제들이니까 괜히 실수해서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다음 청소 도구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와중에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남자 친구 강주호의 학비를 벌기 위해 나는 하루에 알바를 7개 해야 했고, 배가 고파도 찐빵과 생수로 버텼다. 사실 종일 일하고 나면 몸이 어느덧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집을 나서기 전에 그가 만들어준 따뜻한 죽과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을 붙잡고 나중에 돈을 벌면 꼭 완벽한 가정을 이뤄주겠다며 약속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힘이 났다. 언젠간 남자 친구와 결혼하고 싶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감수했다. 게다가 어제 생일이라서 선물로 한정판 운동화를 샀는데 알바를 몇 개라도 더해야 이번 달 월세를 낼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6번 룸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주호야, 아직도 거지 여친한테 비밀로 한 거야? 어드벤처에서 져도 장난으로 봐준다고 했잖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주호라니? 혹시 동명이인?’ “난들 어떡하겠어?”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코웃음과 함께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모르지? 헤어지자는 말은 죽어도 안 해. 궁상맞은 꼬락서니로 알바해서 뒷바라지해준다나 뭐라나. 만약 다음 달까지도 얘기 없으면 도박 빚이 몇천만 원이 있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누군가 옆에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널 그렇게 좋아하는데 빚까지 갚아주겠다고 하면 어떡해?”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이게 정녕 강주호의 목소리가 맞단 말인가? ‘아닐 거야.’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지금까지도 속으로 룸 안에 있는 사람이 단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동명이인이면 좋겠다고 빌었다. 강주호가 이번 달에 돈을 많이 가져간 건 사실이지만 특훈에 참여하기 위해 출국한다고 했기에 절대로 나를 속일 리 없었다. 게다가 어드벤처는 또 뭐지? 고작 게임에 져서 나랑 사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찌 믿겠는가?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친구의 조롱에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그나저나 서은아는 외모만큼 흠잡을 데 없잖아. 가슴도 크고 피부도 좋고 허리도 잘록하니 널 뒷바라지하려고 몸까지 팔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이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미 좀 봤어?” 강주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벌칙이야. 건드릴 생각도 관심도 없거든?” 누군가 혀를 찼다. “탐스러운 열매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정녕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곧이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뭐? 나랑 만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이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하긴,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설마 아무것도 없는 여자에게 목을 매겠어?” 나는 입만 벙긋했고 씁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강씨 가문 도련님이라, 듣기만 해도 있어 보였다. 이엘시에서 난다긴다하는 재벌에 속하는 건 누구나 뻔한 사실이다. 그동안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남자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도련님일 줄이야! 지난 5년 동안 강주호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매일 알바를 7개씩 했고, 월세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아껴 먹고 아껴 썼다. 그렇게 한두 푼 긁어모아 공부시켜주며 행여나 부족한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처참하게 짓밟히는 신세라니! 강주호에게 나라는 사람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건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따지려는 순간 어떤 여자가 다가오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청소하러 왔어요? 밖에서 뭐 해요?” 그제야 룸 안의 사람도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강주호는 고개를 들더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스크 때문에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고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람아, 왔어?” 이토록 다정하고 살가운 표정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내가 두 달 동안 모은 돈으로 사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밖에 춥진 않았어? 밥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오는 길에 네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의 팔보채를 포장했거든? 얼른 먹어.”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주호야.” 그제야 커다란 생일 케이크, 그리고 룸 안을 가득 채운 풍선,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값비싼 양주와 선물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내가 차려준 초라한 밥상에 비하면 도련님의 씀씀이에 훨씬 더 부합하긴 했다. 빗자루를 들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름이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괜스레 초라하게 느껴져 고개를 푹 숙인 채 깨진 술병을 묵묵히 치웠다. 강주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의 손을 잡더니 소파로 직행했다. “가람아, 널 위해 선물 준비했어.” 이내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고, 안에 별 모양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일부러 주문 제작한 거야.” 옆에 있는 사람이 농담을 건넸다. “오늘 주호 생일 맞지? 주인공이 되레 선물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 여자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응.” 강주호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곧이어 여자도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네가 좋아하는 한정판 신발을 구했는데 얼른 신어 봐.” 말을 마치고 나서 신발을 힐긋 쳐다보더니 비아냥거렸다. “오늘은 왜 이런 싸구려를 신었대?” 강주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선물한 신발을 벗어 휴지통에 버리고 한정판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에게 싸구려일지 몰라도 야심한 밤까지 고깃집에서 차가운 물로 설거지하고, 무더위에 거대한 인형 탈을 쓰고 전단지를 돌리며 새벽부터 밤늦게 매일 2시간씩 자면서 한 푼 두 푼 모아 겨우 구한 신발이지 않은가? 그동안 서로에 대한 사랑이 두터운 만큼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로 믿었다. 하지만 휴지통에 버려진 신발을 보는 순간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은 역시 씀씀이가 다르네. 아마 2억이 넘을걸?” “첫사랑이잖아. 무려 10년 동안 쫓아다닌 사람인데... 거지 여친이랑 헤어지려고 안달 난 것도 허가람이 귀국했기 때문이지.” “쉿, 목소리 낮춰. 가람이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사람들의 대화가 귓가를 맴돌았고 마치 서늘한 칼날에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듯싶었다. 강주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위해 2억 원이 넘는 목걸이를 선물하고 몇십만 원짜리 팔보채를 포장해 주면서도 정작 자기 여친한테는 흰죽 한 그릇, 노점에서 파는 큐빅 헤어핀 하나, 쿠팡에서 몇천 원에 한 묶음씩 파는 머리 끈마저 사치였다. 둘이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남녀주인공이라면 나는 고작 번지수를 잘못 짚은 신데렐라에 불과했고, 심지어 나서서 추궁할 용기조차 없었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청소를 마치고 룸을 나서려고 했다. 단 한시라도 더 머물러 있기 싫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허가람이라는 여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주호야, 옆 동네 카페에서 파는 밀크티 마시고 싶은데 밖에 비가 엄청 와.” “바보, 돈만 주면 심부름 다녀오겠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강주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나를 불러세우고 지갑에서 돈다발을 꺼내 건네주었다. “밀크티 한 잔 사다 줄래요? 나머지는 팁이에요.”
이전 챕터
1/100다음 챕터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