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만하고 너 먼저 가. 내가 알아서 할게.”
강서윤은 더는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류민희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그녀는 이미 할 만큼 다 했다.
“하...”
강서윤은 손에 든 블랙카드를 내려다보며 살짝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편, 허남준은 아주 늦은 시간에야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자 부모님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눈빛에 기대가 가득했는데, 허남준은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 엄마,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러자 전연화가 궁금하다는 듯 다가왔다.
“오늘 데이트 잘됐니?”
허남준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데이트 아니고 그냥 친구끼리 밥 한번 먹은 거잖아요. 방금 전까지 그렇게 말씀하셨으면서 왜 이제 와서 말이 달라요?”
전연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그냥 밥 한 끼였지. 그래도 앞으로 그 아가씨랑 좀 더 자주 연락하면 좋잖니.”
허대한도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결국 허남준은 순순히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간단히 씻고 막 잠을 청하려던 그때, 휴대전화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채청아가 보낸 것이었다.
[오빠, 오늘 같이 놀아서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봐요.]
허남준은 문득 미소를 지었다가 곧 복잡한 심경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좋은 사람은 정말 흔치 않은데 정작 자신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그는 아주 무난한 답장만 보냈다.
[응, 기회 되면 또 봐.]
휴대폰 너머의 채청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서운해졌지만, 금세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힘내자! 자신을 믿어야지.”
다음 날, 허남준은 일찍 일어나 부모님을 위해 푸짐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지난 7년 동안 강서윤이 밖에서 먹는 건 입에 잘 안 맞는다고 한 말 때문에, 그는 꼬박 7년을 요리해 왔지만 정작 부모님께는 제대로 된 한 끼를 해드린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죄송할 따름이었다.
잠에서 깬 부모님은 식탁 위 한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어머, 우리 아들이 만든 거라니. 맛있어 보이네. 내 음식보다 훨씬 낫겠는걸.”
허대한도 서둘러 거들었다.
“당연하지. 이게 바로 청출어람이 아니겠어. 우리 아들이 아주 좋은 걸 물려받았어.”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식사를 마친 뒤 전연화는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남준아, 너 요즘 일도 바쁜데 건강 잘 챙겨야 해. 이런 건 그냥 엄마랑 네 아빠가 하면 돼. 우린 아직 거뜬해.”
“그래, 네가 우리 챙겨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허남준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아빠, 엄마,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했죠. 앞으로는 잘해드릴게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재빨리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이 더 말릴 기회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허대한과 전연화는 서로 마주 보았다.
“우리 아들 철이 들긴 든 것 같네. 부모 생각도 해주고.”
전연화는 울컥하며 진심을 털어놓았다.
“우리 남준이는 이렇게 잘났는데 어쩌다가 그런 일을 겪은 걸까요. 아이고...”
허대한은 말없이 멈춰 섰다. 젓가락에 올려둔 밥은 한참이나 입에 넣지 못했다.
...
병원에 도착한 허남준은 다시 한번 일벌레 모드에 돌입했다.
본업만 완벽히 해내는 게 아니라, 동료들 일까지 도와주는 바람에 그의 하루는 숨 돌릴 틈 없이 흘러갔다.
수술을 연달아 다섯 건이나 맡았고 매번 직접 집도했다. 수술 후에는 환자들의 회복 과정까지 일일이 챙기며 완벽에 가까운 관리를 했다.
그렇게 다섯 번째 수술까지 마치고 난 뒤, 허남준은 탈진한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마음을 잊으려고 일에만 매달렸지만, 결국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노력으로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때 누군가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사부님, 이거 좀 드세요.”
뒤돌아보자, 청순한 인상의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경해 의대를 갓 졸업한 인턴으로 원장이 직접 허남준 밑에 붙여 준 제자 겸 조수였다.
장수연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또렷하고 예쁜 눈을 깜박였다.
“사부님, 왜 이렇게 몸을 혹사하고 계세요? 원장님께서 휴가도 주셨잖아요. 집에 가서 쉬셔도 되는데.”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결국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게다가... 사부님, 최근에 막 이혼하셨다고 들었어요.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그냥 돌아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허남준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나 정말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장수연은 입을 살짝 내밀었다.
“사부님, 저한테는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돼요. 저 대학교 때 심리학도 조금 들었거든요. 지금 사부님 상태는 흔히 말해서 이혼 후유증 같아요.”
허남준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됐어, 됐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나 진짜 아무 문제 없어.”
“그래도 무슨 일 있으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제가 심리학 전문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마음 정리하는 건 도와드릴 수 있어요.”
허남준은 고개를 저었다. 장수연에게 괜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 했지만, 눈을 감는 순간마다 머릿속에는 또렷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결국 눈을 다시 뜬 채,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건가...’
그때 문득 문간을 스치는 그림자가 보였다.
잠깐 스쳤을 뿐인데도 허남준은 예리하게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그 뒤를 쫓았다.
그러자 병실 안에 누워 괴로워하는 강서윤이 보였고, 옆에는 문석진이 서 있었다. 문석진은 복도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의사! 의사 어디 있어요?! 빨리 좀 와보라고요!”
의사 두 명이 서둘러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석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야 모르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는데 지금 이렇게 아프다잖아요. 당신들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전에 검사했던 의사가 부랴부랴 달려오며 대꾸했다.
“강서윤 씨는 그때 다리 검사를 받으셨어요. 지금은 복부 통증이라는데, 저희 책임으로 몰아갈 이유는 없죠. 어제저녁에 뭘 드셨는지부터 말해 보세요. 아마 음식 문제일 것 같은데요.”
문석진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쇼핑하느라 강서윤이 뭘 먹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난 몰라요. 어쨌든 이건 당신들 문제예요! 빨리 해결해요!”
의사들은 문석진과 더 말다툼하고 싶지 않은 듯 고통에 신음하는 강서윤에게 물었다.
“강서윤 씨, 어제저녁에 뭘 드셨나요?”
강서윤은 배를 움켜쥐고 숨조차 고르기 힘들어 보였다.
바로 그때 허남준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강서윤을 보며 몹시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저녁에 아무것도 안 먹고 술까지 마셨나요?”
강서윤은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창백해진 얼굴이 보는 사람마저 안쓰럽게 만들 정도였다.
허남준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응급실로 옮깁시다. 제가 직접 치료할게요!”
“네!”
응급실로 들어가기 직전, 강서윤은 무의식중에 허남준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강인한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나를 제일 잘 아는 건 남준 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