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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뭐라고?” 문석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봐. 이미 많은 것을 보상했는데 또 해주면, 사람들은 허남준 씨가 돈 노리고 널 속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허남준 씨는 의술이 뛰어나고 병원에서도 톱클래스 의사야.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닐 텐데 우리가 괜히 이럴 필요 없지 않아?” 강서윤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내...” 그때 허남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요. 그건 그냥 강서윤 씨가 가지고 있어요. 저는 이만 갈게요.” 그는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돌아서더니 결심이라도 선 듯 그대로 떠났다. 강서윤의 마음은 다시 한번 무겁게 가라앉았고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한편, 문석진은 손에 들고 있는 문서를 바라보며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윤아, 허남준 씨가 안 가져간다면 이 집 나한테 줘. 마침 나도 거처가 필요했거든.” 그러면서 강서윤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역시 서윤이가 나한테 제일 잘해주네. 걱정하지 마, 나중에 내가 꼭 두 배로 갚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서는 이미 문석진 품 안으로 들어갔다. 강서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에 남아 있던 행복감이 또 한층 옅어졌다. 집 안. 허남준은 손에 든 이혼증명서를 바라보며 여러 기억이 밀려왔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것이 7년간 쏟아부은 노력의 결말이라니. 결국 7년도 어떤 사람의 몇 마디에 못 이기는 건가 싶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계속 우울해했고, 좀처럼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일에만 매달려 지내면서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혀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부모님은 속이 탔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전연화는 식탁에 허남준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한가득 차려놓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허남준의 밥그릇에는 반찬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남준아, 좀 더 먹어. 너 요즘 살도 빠진 것 같아.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이면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전연화의 목소리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허남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 말은 본인조차 믿기 어려웠고, 옆에서 지켜보던 허대한도 한숨만 쉬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허남준은 좀비처럼 멍하니 방으로 돌아갔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 해야겠어요.” 전연화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려던 허남준은 전연화에게 붙잡혔다. “오늘은 병원에 가지 말고 휴가 내. 엄마가 부탁 좀 할게.” 허남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요?” 전연화는 무척 들뜬 듯 웃었다. “당연히 있지, 그것도 아주 좋은 소식이야! 어젯밤에 엄마가 연락 좀 돌렸는데 채청아라는 애가 오늘 시간이 난대. 둘이 밖에 나가 좀 놀면서 정을 쌓아 봐.” 허남준은 소개팅 비슷한 자리라는 걸 알아채고 씁쓸하게 웃었다. “엄마, 저 지금 그럴 마음 없어요. 정신도 없고요.” 하지만 전연화는 이미 옷가지를 그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친구끼리 밥 한 끼 먹는 거잖아. 그게 뭐가 어려워? 게다가 청아는 참 괜찮은 애더라. 전화하자마자 흔쾌히 허락했어. 이미 약속까지 잡았는데 네가 안 가면 내 체면이 안 서잖니?” 결국 전연화의 등쌀에 못 이겨 허남준은 약속 장소에 나가기로 했다. 전에도 한 번 만났던 채청아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기에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조용한 카페 대신 게임센터를 골랐다. 채청아는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눈부신 미모를 뽐냈다. “오빠가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 같아서요. 여기서 기분 좀 푸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허남준은 억지로라도 미소 지으려 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좋지. 들어가자.” 그 뒤로는 거의 채청아 혼자 신나게 게임을 즐겼고, 허남준은 멀뚱히 서 있다가 가끔만 움직이는 것이 마치 좀비와 같았다. 그러고 나서 둘은 걸어서 거리를 한 바퀴 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누구도 소개팅 관련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저물자 채청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빠, 저는 먼저 갈게요. 오빠도 얼른 들어가요. 아주머니가 걱정하겠어요.” 허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채청아에게 다가갔다. “저기... 내가 데려다줄게.” 방금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문석진이었다. 이번에 문석진은 고급 매장을 돌아다니며 강서윤이 준 카드를 쉴 새 없이 긁고 있었다. 보디가드 두 명이 뒤에서 남성용 고급 의류며 명품들을 한가득 들고 따라다녔다. 허남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완전히 한집안 식구가 된 모양이네.” 채청아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굳이 저를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 얼른 돌아가서 푹 쉬어요.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아질 거예요.” 그녀가 이렇게 속 깊게 챙겨주는 걸 보면서도, 허남준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여자 때문에 속상해하면서 다른 여자를 챙겨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은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한편, 회사가 방금 상장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강서윤은 온종일 각종 협업 요청에 시달리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뛰어다녔다. 오늘도 일을 마치고 창밖을 보니 어느새 새벽이 돼 있었다. 꾸르륵. 배에서 소리가 나자, 강서윤은 무심코 옆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그 자리에 허남준이 직접 싸 온 도시락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락은커녕 간단한 간식도 없었다. 그때 비서이자 절친인 류민희가 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늘 야근까지 함께하는 든든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거 좀 마셔. 마시고 나면 속이 그나마 편하지 않겠어?” “고마워.” 강서윤은 커피를 받았지만 한 모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류민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문석진 씨는? 네가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데 데리러 오지도 않아?” 강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석진이는 요즘 몸이 좀 안 좋대. 집에서 쉬고 있어. 난 좀 이따 알아서 갈 거야.” 류민희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몸이 안 좋긴. 그런 사람이 하루 종일 쇼핑하며 물건을 잔뜩 사들일 수 있나?” 강서윤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류민희는 강서윤의 카드 사용 내역을 보여줬다. “네가 직접 봐. 이게 오늘 하루 만에 문석진 씨가 쓴 내역이야. 대체 뭘 그렇게 많이 사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옷도 옷이지만, 보석은 또 왜 이렇게 잔뜩 사는지.” 결제 내역이 억 단위를 훌쩍 넘는 걸 확인한 강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물론 이 카드는 그녀가 준 게 맞고, 마음껏 쓰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하루에 억 단위가 넘는 지출은 좀 심하다고 느껴졌다. 류민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윤아, 내가 이런 말 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네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안 그러면...” “그만 말해!” 강서윤이 말을 끊었다. “그냥 물건 좀 샀을 뿐이야. 별일 아니라고. 그리고 아직 석진이가 사업 제대로 시작 못 했으니까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해.” 류민희가 이어서 더 말하려 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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