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5화

채청아의 말이 떨어지자 네 사람 모두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그중에서 문석진은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분위기가 어색해하기도 했고, 허남준은 채청아가 불편해할까 봐 재빨리 말을 받았다. “다들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저희도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채청아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뜨려 했다. 한편, 강서윤은 말이 없었다. 시선은 오로지 허남준이 잡고 있는 채청아의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석진은 이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허남준을 가로막았다. “만난 김에 채청아 씨랑 같이 식사라도 하죠? 곧 점심때잖아요.”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만...” 허남준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문석진은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채청아의 손목을 흘끗 내려다봤다. 그는 뭔가 짐작했다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아하... 둘이 데이트하러 가요? 괜찮아요. 밥 한 끼 먹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요.” 비꼬는 듯한 말투에 허남준은 미간을 좁혔다. 그를 비꼬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채청아를 희롱하듯 끌어들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강서윤이 느닷없이 냉랭하게 말했다. “같이 먹죠. 괜히 석진이 마음 쓰게 하지 말고요.” 허남준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도 지금의 상황에서 회피하고 싶은 건지, 맞서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이 뒤엉켜 복잡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옆에 있는 채청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청아야, 너는 어떻게 할래?” 허남준의 입에서 나온 다정한 목소리에 강서윤의 눈빛이 잠깐 어두워졌다. 채청아는 이를 눈치챘는지 허남준의 손에서 빠져나오더니 대신 팔짱을 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같이 갈게요.” 결국 네 사람은 쇼핑몰 위층에 있는 한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자, 문석진은 스스럼없이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고추 제육볶음, 매운 오징어볶음...” 거의 매운 음식만 잔뜩 나왔다. 허남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두 매운 음식뿐인데, 왜 그런 걸로만 주문하죠?” 문석진은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곧바로 강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윤이가 예전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전부 주문했어요.” 허남준은 잠깐 침묵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 씨가 아픈 뒤로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많아졌어요. 지금 주문한 것 중 절반 이상은 못 먹을 텐데요.” 문석진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바꿔 실망한 듯한 모습으로 연기했다. “미안해, 서윤아. 네가 제일 힘들었을 때 내가 없었으니까, 지금 네 입맛도 잘 모르네...” 강서윤은 원래 기분이 나빠 보였는데, 이 말이 나오자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녀는 문석진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며 차갑게 허남준을 노려봤다. “허남준 씨가 뭔데 참견이죠? 석진이가 제 취향을 기억해 주고 시키는 게 허남준 씨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러고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아까 주문한 거 전부 내주세요.” 허남준은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래, 내가 괜한 참견을 했네.’ 문석진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해지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그는 메뉴판을 덮고 허남준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혹시 더 주문할 거 있으면 골라봐요.” 허남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메뉴판을 채청아에게 건넸다. “너 먹고 싶은 거 더 시켜.” 이 식사 자리에서 그가 신경 써야 할 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채청아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주문을 마치자, 문석진은 갑자기 술 한 병을 시키더니 허남준과 한잔하겠다고 나섰다. 허남준이 대답할 틈도 없이 문석진은 잔을 따라 건네려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얇고 가냘픈 손이 순식간에 허남준의 술잔 위를 덮었다. “오빠는 술 못 마셔요.” 채청아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문석진은 사실 허남준을 잔뜩 취하게 만들어 강서윤 앞에서 실수라도 하게 할 속셈이었다. 채청아가 불쑥 나서자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곧 강서윤을 힐끗 보며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남준 씨, 아직도 저랑 서윤이한테 화났어요? 서윤이가 저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저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근데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요. 이혼 위자료를 받는 걸 보고 저랑 서윤이를 용서한 줄 알았는데... 역시 제 착각이었네요.” 그가 말할수록 강서윤의 표정은 더 험악해졌다. “허남준 씨, 석진이가 이런 말까지 하는 데도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녀 스스로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채청아가 허남준과 다정하게 앉아 있는 걸 보니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 묵직하게 얹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움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려가 주지도 않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했다. 뭐가 됐든 허남준이 문석진을 곤란하게 만든 탓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식탁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걸 느낀 채청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슬며시 손을 거둬들였다. 허남준은 잔을 꼭 쥐고 강서윤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잔을 비우면 저희 사이도 정리되는 거죠?” 강서윤은 잠시 멍해졌다. 허남준의 강렬한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냉정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허남준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옆에 있던 채청아가 재빨리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오빠 위도 안 좋은데 지금 빈속이잖아요. 이거 한 번에 마시면 큰일 나요.” 허남준은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이제 마셨으니 더 이상 죄책감 느낄 거 없어요. 두 사람 행복하길 바랄게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운 양념이 잔뜩 묻은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허남준은 속에서 불이 나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치고, 강서윤과 문석진에게 간단히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쇼핑몰을 막 나선 그는 한층 심해진 속쓰림에 점차 숨이 가빠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뱄다. 비틀거리는 순간 누군가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많이 힘들어요? 저한테 기대요. 병원으로 데려다줄게요.”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