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허남준은 결국 전연화의 성화에 못 이겨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동생을 만나보기로 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 채청아는 늘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오빠라고 부르던 통통한 소녀였는데, 정말 오랜만에 만나니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사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맑고 단정한 모습에 잠시 놀랐다.
“...청아야?”
눈앞의 채청아는 작고 갸름한 얼굴에, 선이 고운 눈썹 아래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웃음이 번질 때마다 맑은 샘물이 사람 마음속으로 흘러드는 듯 포근했다.
장밋빛 입술은 부드럽게 빛났고, 뽀얀 피부에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이 은근한 나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채청아는 스스럼없이 허남준 맞은편에 앉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저예요, 오빠. 못 알아봤어요?”
허남준은 자신이 잠깐 굳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너 정말 많이 변했구나. 더 예뻐졌네.”
그 말에 채청아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고마워요, 오빠.”
“뭐 마실래? 내가 살게.”
두 사람은 음료를 시킨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얘기를 이어가다 보니 허남준은 묘하게 기분이 들었다.
취향부터 관심사까지 겹치는 부분이 많아, 그가 좋아하는 건 채청아도 흥미로워했다.
그는 마시던 차를 살짝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이렇게 취향과 가치관이 찰떡같이 맞는 일이 드물다는 걸 잘 안다. 보통은 좋아하는 쪽이 먼저 맞춰주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채청아가 정말 자신과 이렇게 잘 맞는 건지, 아니면 배려해 주고 있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아직 강서윤과 이혼 절차를 완전히 끝내지 않았고, 지나간 감정을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관계를 시작하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청아야, 나 있잖아...”
“네, 오빠. 어려워하지 말고 전처럼 편하게 대해줘요.”
허남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엄마가 우리를 이어주고 싶으신 것 같아. 근데 난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됐어. 미안해. 내 말 이해하지?”
그는 꽤 직설적으로 말했다.
혹시 채청아가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다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괜히 어중간하게 희망 고문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역시나 그의 말이 떨어지자 채청아의 미소가 잠깐 굳었다.
당장 분위기가 얼어붙나 싶었는데, 그녀는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럼요. 저도 사실 부모님이 자꾸 재촉해서 나온 거예요. 오빠 마음 이해해요. 게다가 저희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잖아요.”
허남준은 마음속에 걸려 있던 돌덩이가 내려앉듯 안도했고 긴장도 풀렸다.
“고마워.”
“감사 인사는 일단 넣어둬요. 저희 이제 같은 편이 된 거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요? 바로 옆에 쇼핑몰이 있잖아요. 아빠 생신 선물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는데 좀 도와줘요.”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허남준은 선뜻 허락했다.
두 사람은 함께 카페 근처 쇼핑몰로 걸어갔다.
막 쇼핑몰에 들어선 허남준은 뒤쪽에서 날아드는 두 시선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문석진은 강서윤에게서 결혼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겠다고 쇼핑몰에 오게 되었다.
마음이 살짝 뒤숭숭한 차에 고개를 들었더니, 저 앞에서 허남준이 젊고 예쁜 여자와 나란히 쇼핑몰을 걸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희가 말한 여자가 저 사람이겠지? 생긴 건 괜찮네... 그래도 몸매는 내가 더 낫지 않나.’
이런 생각에 강서윤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허남준 곁에 있는 여자를 의식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아니, 이건 좀 아니지.’
마침 마음이 복잡하던 찰나 문석진도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저 사람 허남준 씨 아니야?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새 여자친구를 사귀지? 설마 네가 준 위자료 들어오자마자 저런 거야?”
알 수 없는 의심이 담긴 그의 말에 강서윤의 속은 더더욱 답답해졌다.
“나랑은 이미 이혼 협의서 썼으니까 누구랑 만나든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려 했지만, 문석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좀 미안하잖아. 어떻게 보면 그 사람 배신한 꼴이니까. 가서 인사라도 하자. 어차피 네가 돈도 줬고 이제 빚진 건 없어. 이대로 그냥 가면 우리가 괜히 찔려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강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와 함께 허남준 쪽으로 걸어갔다.
한편, 허남준은 채청아와 함께 시계 매장을 둘러보고 막 나온 참이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문석진과 팔짱을 낀 강서윤이 시선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고 알 수 없는 통증이 심장을 후벼 파듯 밀려들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문석진이었다.
“우연이네요. 요즘 잘 지내요?”
허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문석진은 이내 채청아를 힐끔 보고는 살짝 눈빛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역시 인기 많네요.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채청아는 조심스레 허남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허남준은 강서윤과 짧게 시선을 맞추고는 담담하게 소개했다.
“이쪽은 채청아, 제 친구예요.”
그리고 강서윤과 문석진을 번갈아 보며 덧붙였다.
“여긴 강서윤 씨라고 강산 그룹 대표야. 그리고 이쪽은 문석진 씨.”
잠시 숨을 고른 허남준은 작게 멈칫하다가 말을 마무리했다.
“강서윤 씨 약혼자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석진의 눈에는 은근히 뿌듯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런데 강서윤은 서둘러 부정하고 나섰다.
“아니에요!”
조금 급하게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나머지 셋은 잠깐 멈춰서 서로 다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혹스러움을 느낀 강서윤은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희 아직 이혼 절차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해서 석진이한테 좋을 거 없어요.”
이 말을 듣고서야 문석진의 표정이 풀리는 듯했고, 허남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은근한 우월감이 스쳤다.
허남준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굳은 채 밀려오는 허탈함을 삼키고 있었다.
강서윤이 문석진을 각별히 챙기는 건 익히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역시 마음 한구석이 쓰리고 허무했다.
옆에서 채청아도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윤 씨는... 약혼자를 참 잘 챙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