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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허남준이 강서윤의 집에 두었던 물건은 많지 않았다. 강서윤이 회복한 뒤로 줄곧 업무에 매달려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허남준도 한가한 시간이 늘었다. 그는 자주 쓰는 옷가지나 물건을 병원 숙소에 옮겨두었고, 이번에 쫓겨난 뒤에도 딱히 챙길 게 없어 곧장 본가로 돌아갔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부모가 환히 웃으며 달려 나왔다. 특히 어머니 전연화는 벅찬 듯 그를 꽉 끌어안았다. “남준아! 드디어 돌아왔네. 엄마는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오랜만에 본 부모는 어느새 하얀 머리카락이 부쩍 늘었다. 허남준은 그 모습을 보고 눈가가 금세 뜨거워졌다. 왜 며칠 못 본 사이에 이렇게 늙으신 건지 속상했다. 전연화는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배는 안 고프니? 얼른 밥 차려줄게. 근데 서윤이는 같이 안 왔어? 요즘 몸은 좀 어떻대?” 강서윤 이야기가 나오자 허남준은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히 밝혔다. “저... 강서윤 씨랑 이혼하기로 했어요.” 전연화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담담히 물었다. “부부가 살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거지. 큰일이 아니면 조금씩 양보하며 지내면 좋잖니.” 허남준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윤 씨가 먼저 꺼낸 얘기예요.” 전연화는 깊은 한숨을 쉬며 걱정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너희가 결혼한 것도 네 아빠 치료비 때문이었으니, 네가 그동안 서윤이 다리 고쳐주며 돌봐준 걸로 은혜는 갚았다고 생각해. 그동안 네 행복을 희생시킨 것 같아서 엄마는 늘 미안했어.” 그 말에 허남준의 가슴 한구석이 저려 왔다. 예전에는 스스로 아픔을 삼키며 살았는데, 부모님이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는 울컥한 채로 말했다. “엄마, 제가 결혼한 거 아빠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 원래부터 강서윤 씨를 좋아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대학 때 무대 위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던 강서윤은 허남준에게 잊기 힘든 존재였다. 그녀를 위한 마음 하나로 의학을 전공했고 계약 결혼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결국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허남준은 쓴웃음을 지었고, 전연화는 다시금 울컥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꼭 안았다. “넌 정말 착한 아이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근데 이제는 걱정할 것 없어. 우리 작은 가게를 열어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니까, 너도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지내.” 그렇게 본가에 돌아온 허남준은 병원에 긴 휴가를 내고 한동안 부모 곁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막 일어난 허남준은 전연화가 부르는 소리에 거실로 나갔다. “남준아, 예전에 옆집 살던 소영이 기억하지? 소영이가 너를 그렇게 좋아했다네. 너도 이제 혼자가 됐으니 한 번 만나봐도 괜찮지 않겠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허남준은 문 쪽으로 가며 피식 웃었다. “엄마, 아직 이혼 절차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영 씨한테 미안하지 않겠어요?” 전연화는 짧게 눈짓을 주며 핀잔을 줬다. “협의서에 도장 찍었다면서? 그럼 큰 문제 없잖아.” “그건 맞죠.”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내다본 그는 조금 놀랐다. 뒤에서 전연화는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이혼하기로 한 거면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정 안 맞으면 그냥 친구 하면 되지.” 반쯤 열린 문틈 너머에는 강서윤의 절친이자 개인 비서인 류민희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류민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허남준이 대답도 하기 전에 안쪽에서 전연화가 반갑게 외쳤다. “남준이 친구인가 보네? 들어와서 차라도 마셔.” 류민희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어머니. 오늘은 허남준 씨 데리고 나갈 일이 있어요. 의논할 게 좀 있어서요.” “그래, 그래. 얼른 다녀와.” 두 사람은 곧장 밖으로 나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류민희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예전의 결혼 계약서에 적혀 있던 내용과 강서윤이 남은 기간을 포기하면서 마련한 추가 보상안이었다. “뒷부분에 추가 합의서가 있어요. 돈을 좀 더 얹었거든요. 이런저런 거 다 합치면 아마 160억 정도 될 거예요.” 강서윤다운 처사였다. 그녀는 항상 돈을 쓰는 데 통이 컸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한 결혼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챙겨줄 줄은 몰랐다. 허남준은 협의서에 적힌 액수를 보고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류민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정말로 서윤이를 포기하는 거예요?” 허남준은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억누른 채 펜을 들어 서류에 서명했다. “포기라기보다는 서로 합의한 거죠. 서윤 씨가 행복하면 됐습니다.” 뜻밖의 답에 류민희는 잠깐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조금의 원망조차 느껴지지 않는 태도가 의외였다.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던 그녀는 그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받으시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걱정이 없겠네요.” 허남준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담담히 입을 열었다. “결혼이 돈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보세요? 강서윤 씨가 이만큼 주는 건 첫사랑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겠죠. 그리고 제가 그걸 받아들이는 건 서윤 씨가 미안해하지 않길 바라서고요.” 류민희는 복잡한 기분으로 서류를 챙겼다. 그녀는 허남준이 얼마나 정성을 쏟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서윤은 냉정했다. 과거 최악의 순간에 자신을 버렸던 문석진을 잊지 못한 채, 그가 돌아오자 허남준을 바로 밀어냈다. “몸 잘 챙기세요.” 결국 류민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떴다. 차에 올라탄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강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윤아, 방금 네 시어머니가 남준 씨 선 자리를 알아보는 것 같더라. 진짜로 이혼할 거야?” 전화 건너 잠깐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이혼했어. 그 사람이 누굴 만나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도 이제 석진이 있으니까 그 얘긴 더 듣고 싶지 않아. 괜히 오해만 생길 테니까.” 류민희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강서윤의 말투가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떠보듯 물었다. “진짜? 그럼 내가 허남준 씨한테 대시해도 되겠네? 사실 내 이상형이거든. 잘생기고, 친절하고... 바쁜 의사인데도 널 매일 챙겨줬잖아. 솔직히 남준 씨 마음이 너한테만 가 있지 않았어도, 나 진작에 움직였을 거야. 어차피 넌 처음부터 석진 씨밖에 없었잖아. 이렇게 되면 친구 남자 뺏는 건 아닌 거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전화를 끊은 건가 싶어 류민희가 다시 부르려고 했다. “서...” “마음대로 해.” 전화가 툭 끊기는 소리에, 류민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고 조용히 차를 몰았다. 한편, 강서윤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끊긴 전화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증이 느껴져 주변을 둘러봤지만, 예전 같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놓여 있을 패션프루트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잡다한 충전기 선들뿐이었다. 정체 모를 답답함이 가슴 속을 매섭게 파고들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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