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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허남준은 주방에 오래도록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재료 손질은 이미 끝나 있었고, 그는 능숙한 솜씨로 강서윤이 가장 좋아하는 갈비찜을 완성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곧 집안에서 고용한 주방장을 불렀다. “서윤 씨 입맛이 일반 레시피랑 좀 달라요. 그리고 몸보신에 좋은 레시피가 따로 있어요. 제가 적어둘 테니 앞으로 부엌을 잘 부탁해요.” 주방장은 웃으며 그를 놀리는 듯 말했다.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이 만들어주는 요리를 제일 좋아하세요. 저희가 아무리 해도 그 맛을 똑같이 내긴 힘들 것 같아요.” 과거의 감정이 파도처럼 덮치자 허남준은 숨이 막혀왔다. “곧 이혼할 거라서, 이제 더는 제가 할 일이 없을 겁니다.” 주방장이 굳어 버린 사이 허남준은 이미 음식을 들고 주방을 나섰다. 다이닝룸에 들어선 그는 강서윤 대신 불청객이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상대는 다름 아닌 문석진이었다. 허남준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러 담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문석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수고했네요. 음식 다 준비했으면 좀 쉬어요. 식사 끝나면 제가 치울게요.” 막 접시를 내려놓으려던 허남준의 손이 잠시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문석진이 고개를 들어 허남준을 보며 약간 도발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쪽이었어요? 서윤이가 말해주더라고요. 지난 시간 동안 저 대신 서윤이를 잘 돌봐줘서 고맙네요.” 그 말은 마치 허남준이 쏟아부은 세월이 전부 헛수고였다는 듯 가슴을 후벼팠다. “그건 저랑 서윤 씨 사이 일이에요. 문석진 씨랑은 상관없어요.” 허남준은 접시를 내려놓고 문석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자리를 잡자, 문석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훑어봤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말을 뱉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죠? 그쪽이 7년 동안 집안일까지 떠맡아 보살폈다 한들, 다리까지 고쳐놨다고 해도 결국 제 전화 한 통이면 곧장 제게 오잖아요. 자꾸 욕심내지 마요. 자격도 안 되면서.” 허남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가슴 한가운데가 아려 왔다. “문석진 씨, 연기를 참 잘하네요. 서윤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평생 못 걸을 거라고 생각하고 해외로 가버린 거잖아요. 이제 와서 다시 돌아온 의도가 뭔지 궁금하네요.” 문석진의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지만 이내 허남준 등 뒤쪽을 스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건 제 잘못이에요.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암 진단을 받았거든요.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서윤이가 절 보면 더 힘들어할까 봐 해외에서 치료할 수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가족들이 제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서윤이와의 연락을 전부 끊었어요. 그래서 저 대신 돌봐준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허남준은 식탁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말이 너무나도 기만적으로 들렸다. “이 타이밍에 돌아온 게 정말 돈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연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허남준이 순간 멍해졌을 때 강서윤이 다가와 두 사람 사이의 빈자리에 앉았다. “허남준 씨, 세상 모든 사람이 돈 때문에 뭐든 한다고 생각하지 마요. 그렇게 남을 의심하는 건 옳지 않아요.” 강서윤의 말뜻은 분명했다. 이런 그녀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회사를 물려받을 때 이사회에서 갖은 방해가 들어와도 언성을 높이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문석진을 두둔하기 위해 과거 일을 들춰서 허남준을 공격하고 있었다. 역시 7년간의 결혼 생활도 그녀의 첫사랑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허남준의 얼굴이 굳자 강서윤은 노골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가요. 허남준 씨가 있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아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서 허남준의 심장을 깊숙이 베었다.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 시간 쌓여온 울분이 있었다. 언제나 그녀가 힘들까 봐 참아왔지만 문석진의 등장이 결정타가 되었다. “알겠어요. 먼저 가볼게요. 시간 되면 연락해요. 이혼 서류 받고 나면 서로 볼 일 없겠네요.” 허남준은 현관 열쇠를 꺼내 강서윤의 곁에 내려놓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강서윤은 열쇠고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때 낡아서 버리려던 인형 열쇠고리를 그냥 던져줬을 뿐인데, 그는 지금까지 계속 갖고 있었다. 다이닝룸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고, 문석진의 눈빛에는 우월감과 비웃음이 스쳤다. “미안하네. 괜히 너한테 민폐 끼친 것 같아서... 난 그냥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강서윤의 손을 꼭 쥐었다. 강서윤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우린 껍데기뿐인 계약 결혼이었으니까.” 문석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같이 살았잖아. 나는 그 껍데기조차 없는데.” 그의 말에 강서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혼한 7년 동안, 그녀와 허남준은 늘 다른 방을 썼다. 처음에는 베개 밑에 전기 충격기까지 숨겼는데 결국에는 괜한 걱정이었다. 허남준은 언제나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금욕적 기운도 은은하게 감도는 것이 흰 가운을 입었을 때는 정말 소설 속 남자 주인공 같았다. 가끔은 문석진보다 더 멋지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오래도록 마음에 품은 건 문석진이다. 허남준의 보살핌만으로 그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인연이 아니었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강서윤의 마음은 다시 평온해졌고 문석진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옛정이 묻어났다. “걱정하지 마. 이혼 절차 끝나면 바로 너랑 결혼할 거야.” 문석진의 눈빛이 잠깐 환해졌지만 곧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근데 다른 사람들은 사정을 모르니까, 내가 끼어들어서 허남준 씨가 내쫓겼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강서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차분히 답했다. “걱정 안 해도 돼. 허남준 씨한테는 충분한 보상을 해줄 거니까. 그 정도면 먹고사는 건 문제 없겠지. 우린 할 도리 다 한 셈이고. 여론은... 회사에 부탁해 잘 관리할 거야. 네가 나랑 안 지 훨씬 오래됐다는 걸 알게 만들면 되니까.” 문석진은 빙그레 웃으며 강서윤을 끌어안았다. 그 눈에는 달콤함과 계산이 겹쳐 있었다. “고마워, 서윤아.” 강서윤은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옛사랑의 감정에 다시 빠져들려 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예전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향기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날, 강서윤이 식탁 앞에 앉자마자 주방에서 바로 몸보신 음식을 내왔다. 그녀는 한 입을 머금었다가 그대로 뱉고 말았다. 이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무슨 약 냄새가 이렇게 진해요? 예전이랑 전혀 다른데요? 허남준 씨가 레시피 안 줬어요?” 곁에 있던 주방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받긴 했지만 예전에는 선생님이 직접 만드셨잖아요. 저희는 처음 해봐서 그런지 불 조절이나 약재 비율을 잘 못 맞췄나 봅니다.” 강서윤은 인상을 쓴 채 국물을 휘젓다가 결국 숟가락을 놓았다. “알겠어요. 수고했네요. 가보세요.” 주방장이 물러난 뒤에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묘한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마치 속에 돌덩이가 걸려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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