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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TV 속에서 경해시 증권거래소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허남준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쓰라림이 차오르고 있었다. 화면 속의 강서윤은 눈처럼 고운 피부를 지닌 채, 세련되게 재단된 정장을 입고 우아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래에 있던 기자들은 기회를 잡자마자 앞다투어 질문했다. “강서윤 씨, 전에 부상을 당해 한동안 하반신 마비 상태였다고 들었는데,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말씀해 줄 수 있나요?” “소문에 따르면 남편분이 유명한 병원의 전문가라고 하던데, 혹시 치료받는 동안 가까워지신 건가요?” “강서윤 씨, 오늘은 남편분을 데려오지 않으신 건가요?” TV 속 강서윤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에만 답했다. “그 사람도 자기 일이 있고, 저도 제 일이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친한 친구만 같이 왔어요. 그래도 분명히 저를 보고 기뻐해 줄 거라고 믿어요.” 기자들이 일제히 축하 인사를 건네는 가운데, 오직 허남준만 알아챘다. 강서윤의 뒤편에 서 있는 남자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강서윤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첫사랑 문석진이었다. 결혼 4년 후, 허남준은 주치의가 되어 직접 메스를 잡고 강서윤의 수술을 집도했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뻐할 새도 없이 마취에서 깨어난 강서윤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문석진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어야 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진 뒤였다. 사실 강서윤에게 이 결혼은 종이 한 장짜리 계약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부터 못을 박았다. “저희는 그냥 계약 관계일 뿐이에요. 기간은 8년이고, 만약 석진이 일찍 돌아온다면 바로 끝내고 이혼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결혼하고도 오랫동안 문석진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허남준의 헌신과 다정함 덕분에 강서윤의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치료에도 차츰 효과가 나타났다. 그녀는 마침내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회복한 다음 강서윤은 바로 업무에 복귀하며 회사를 이어받았다. 모든 게 잘 풀리는 듯싶었던 그때, 소식이 끊겼던 문석진이 느닷없이 돌아왔다. 원래는 심통을 부리던 강서윤이었지만, 문석진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말하자 한순간에 그의 이야기를 믿어버렸다. 그가 말하길, 그 시절 집안사람들에게 끌려 해외로 가서 감시받느라 그녀를 돌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한마디에 그녀 마음속 깊이 감춰져 있던 사랑이 완전히 터져 나왔다. 사실 허남준은 이미 병원에 휴가를 낸 상태였다. 오늘은 강서윤과 함께 증권거래소에 가서 종을 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문석진을 만나고 돌아온 후, 갑자기 돌변해 그에게 차갑게 굴었다. “석진이 돌아왔어요. 저 예전에 약속했거든요. 회사가 상장하면 그 사람이랑 같이 종 치기로... 그러니까 남준 씨는 오지 마요.” 강서윤의 얼굴을 보며 그는 가슴이 저릿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마침 병원에 수술도 있어서 그냥 빠질게요.” 강서윤은 마음의 짐이 덜어진 듯 안도하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하지만 TV를 통해 그녀가 문석진과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본 허남준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에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남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왔어요?” “네.” 강서윤은 차 열쇠를 내려놓으며 작게 대답했다. “소파에 잠깐 앉아서 기다려요. 할 말이 있어요.” 잠시 후, 그녀는 서류 한 장을 들고 와 그에게 건넸다. 이혼협의서라는 글이 보이자,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박살 났다. 찰나에 온몸이 굳어버렸고 심장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7년 전의 강서윤은 모두가 좋아하던 퀸카이자 강씨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녀와 문석진도 자유연애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닥쳤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허남준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 그 결과, 뇌 속의 혈전이 신경을 압박해 하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하룻밤 새 그 잘난 여자가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감히 다가서지도 못했던 남자들이 너도나도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집안 운전기사조차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준비해 구애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린 건 오랫동안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친구 문석진이 해외로 떠난 뒤로 전혀 소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점점 더 우울해하던 강서윤은 결국 감정마저 폭발했고 기복이 극도로 심해졌다. 강씨 가문에서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녀와 계약 결혼할 상대를 찾았고, 마침 아버지의 치료비가 급했던 허남준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혼?” 이 순간 강서윤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확고한 결심이 어린 빛이 스쳐 갔다. “허남준 씨, 말을 빙빙 돌리지 않을게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돌봐주지 않았다면, 저는 진작 무너졌을지도 몰라요. 정말 미안해요... 이혼하고 나서도 남준 씨가 가져갈 건 전부 챙겨 줄게요. 거기에 60억 원도 추가로 보상해 줄게요.”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인 이상 마냥 매정하기도 어려운 법이다. 오랜 세월 허남준이 베푼 세심한 보살핌과 다리를 고쳐주려 했던 노력을 그녀도 알기에 더욱 미안했다. 조금씩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가끔은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문석진이 돌아오자, 그녀는 깨달았다. 감사와 사랑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문석진이었다. 한참 침묵하던 허남준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원래도 계약은 8년이었고, 이제 곧 끝나잖아요.” 예상했던 언쟁이나 분노는 없었다. 허남준은 가볍게 동의하더니 서류에 금세 서명을 마쳤다. 그 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이혼 서류 받으러 갈까요?” 강서윤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담담한 태도에 당황한 것이다. 보통이라면 화를 내든가 배은망덕하다고 비난할 만도 한데, 그는 너무 조용했다. 허남준은 사인한 서류를 그녀에게 돌려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다. “오늘 뉴스 봤어요. 강서윤 씨랑 그 사람 참 잘 어울리더라고요.” 순간 정신이 든 강서윤은 목이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저...” 그녀는 한참 뒤에야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원래도 계약 결혼이었고, 강서윤 씨를 좋아했던 건 제 사정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제일 힘들 때, 강서윤 씨가 제 아버지를 살려줬어요. 이제 회사도 상장했고 스캔들 걱정도 없으니 이때가 가장 좋은 타이밍이겠네요. 계약 기간도 끝나 가는데 제가 뭐 자본가한테 반항할 권리가 있겠어요?” 그의 어조는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 마치 친구에게 농담이라도 건네는 듯 들렸다. 하지만 강서윤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허남준이 강서윤을 뼛속까지 사랑하기에 모든 걸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혼 얘기에 이렇게 평온할 줄은 몰랐다. 서늘한 침묵이 흐르던 찰나, 강서윤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고요함을 깼고, 허남준은 장난스레 물었다. “배고파요?” “조금요.” 강서윤은 머쓱해하며 배를 감싸 쥐고 답했다. “그럼 앉아 있어요. 마지막으로 밥 차려줄게요.” 그는 서둘러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도망치듯 급히 사라지는 뒷모습에서는 감춰지지 않는 슬픔이 비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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