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소희연은 본능적으로 전승군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으며, 날카롭고 깊은 검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그저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소희연은 순간 기분이 불쾌해졌다.
소속 호위무사들은 전승군이 직접 키운 사람들이었고, 군이 곁에 두고 있는 휘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승군의 통제력이라면 언제든지 호위무사들과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고, 군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녀와 군이가 산적을 만난 일은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 몰라도, 전승군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원군 저택에 온 것이지, 사실은 회갑연을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구경거리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소희연은 손에 들고 있던 차 한 잔을 휘두르며 소실 홍씨의 얼굴에 쏟아버렸다!
“켁켁...”
기절했던 홍씨는 뿌려진 차에 깨어났다.
“신경혜,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신홍철은 소희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 당사자가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소희연은 차갑게 말하며 산적 앞에 다가가 입을 막고 있던 헝겊을 떼어내었다.
산적은 입을 벌려 침을 뱉기만 하면서 아직 말을 하지 못했다.
소희연이 말했다.
“방금 들었지? 내가 너를 엮어서 아버지를 모함했다고 했어. 이제 태자 전하와 모든 손님들 앞에서 다시 묻겠다. 대체 누가 너한테 돈을 줬어?”
모든 시선이 산적에게 쏠렸다.
신홍철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미 너한테 매수당했는데 당연히 네 편을 들겠지.”
소희연은 차갑게 대답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너무 서두르시는군요.”
홍씨는 방금 깨어나 얼굴에 묻은 차를 닦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서 일그러진 산적의 얼굴을 보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저주받을 년, 나를 팔아넘기다니! 내가 죽으면 너도 결코 편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산적은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실 홍씨가 그를 배신해 결국 그가 죽을 뻔했던 일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이 죄를 씻어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남은 인생은 이제 감옥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이렇게 만든 소실 홍씨를 더욱 원망했다.
이 일을 맡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호랑산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았을 텐데 말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전하, 소인은 그저 한낱 산적이오나, 모든 진실을 고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차라리 종신토록 옥에 갇히는 한이 있어도, 제발 목숨만은...”
산적이 곤룡포를 입은 태자를 보며 절박하게 외쳤다.
태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일단 말해 보거라.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소인은 구차하게 거짓말할 생각 없사옵니다! 바로 저 빌어먹을 년이 소인을 사주해 남원군 댁의 셋째 아가씨를 해치라 시켰사옵니다!”
산적은 주저 없이 소실 홍씨를 가리켰다.
홍씨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거짓이옵니다!”
“이년이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구먼! 증거도 있다!”
산적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 소인의 옷 속을 뒤져 보면 알 것이옵니다.”
소실 홍씨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녀는 갑자기 배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 나리...”
“무슨 일이냐?”
신홍철이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배... 배가…”
소실 홍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겨우 몇 마디를 내뱉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신홍철은 그녀가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도 그녀가 꾀병을 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 대감.”
태자는 조성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위는 군말 없이 산적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뒤졌다.
그리하여 꺼낸 것은, 하나의 금비녀였다.
비녀는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특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거, 금수각에서 금방 나온 신상품 아니오?”
한 기품 있는 부인이 알아보고 말했다.
조성위는 장신구에 대한 조예가 없었기에,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대부 부인이 친절히 설명했다.
“금수각에서 나오는 장신구는 하나하나 고유한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더욱이 신상품이라면 사전에 예약을 해야 살 수 있지요. 누가 이 비녀를 샀는지는 금수각에 가서 확인하면 바로 나올 것입니다.”
“고맙소.”
조성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녀는 곧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확인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게 바로 저년의 비녀입니다! 그날 저랑 거래할 때도 이걸 꽂고 있었습니다! 혹시 딴소리할까 봐 제가 몰래 뽑아 놔서 저년은 자기가 잃어버린 줄도 몰랐을 겁니다.”
산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소실 홍씨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내 비녀?’
그녀는 정말로 비녀를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 찾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자, 이제 증거까지 나왔습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다들 아셨겠지요?”
소희연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조 대감이 매서운 눈빛으로 소실 홍씨를 내려다보았다.
“홍씨, 네 죄를 알고 있느냐?”
소실 홍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반박하기도 전에 갑자기 극심한 복통이 밀려왔다.
“악!”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배를 움켜쥐었다.
뜨거운 액체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기! 내 아이를 살려주세요...”
소실 홍씨가 절규했다.
신홍철은 얼이 빠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치맛자락 아래로 붉은 피가 천천히 스며드는 걸 보았다.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선영이가 임신을 하고 있었다고?’
그것은 홍씨조차 몰랐던 사실인 듯했다.
아직 태기가 드러나지 않은 데다, 최근 몇 차례 감정의 기복이 컸던 터라 결국 유산기가 온 것이었다.
순식간에 대청 안이 술렁였다.
“어의를 불러라.”
태자 역시 피가 고이는 바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의! 어의를 불러오라!”
신홍철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홍씨를 안은 채 고함쳤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들일 것이니 이 아이는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신홍철이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가 올해 이미 마흔을 넘겼음에도, 그동안 얻은 자식은 모두 딸뿐이었다.
막내딸도 이미 열 살이 넘었다.
첩들은 몇 년째 아이를 갖지 못해 그는 은연중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아들을 얻지 못한다면 정말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소실 홍씨가 임신을 했단 말인가?
이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아이를 살려야 했다.
남원군 부친 역시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순간 모든 것을 잊고 손자를 구하는 데만 집중했다.
마침 자리한 어의가 급히 나서서 소실 홍씨의 맥을 짚어보았다.
“부인의 기운이 너무 요동친 데다, 태아가 아직 약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유산 위기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신홍철은 눈이 벌게져 물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다행히도 부인의 체력이 괜찮으니, 제가 안정시키는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약을 복용한 후 반드시 안정을 취하면 태아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이오. 어서 처방을 써주시오! 어서!”
신홍철이 다급하게 외쳤다.
홍씨는 이미 고통으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어의는 처방을 끝내자 남원군 부친은 직접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게 했다. 그리고 홍씨를 뒤채로 보내어 안정을 취하게 했다.
“잠깐.”
소희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