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대감 어르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일어나십시오.”
태자는 놀라며 급히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남원군 부친은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그냥 무릎 꿇게 해 주시옵소서! 소신은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와 백성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부끄러울 것 하나 없사옵니다. 하오나 나이가 들어 그런지 자식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마음이 드옵니다! 이 일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태자 전하를 뵐 면목이 없사옵니다.”
남원군 부친이은 소매로 눈물을 닦고 허리를 더 깊이 숙이자 희끗한 머리카락과 구부정한 모습이 보였다.
태자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남원군 부친이 젊었을 때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며 충성을 다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가슴이 무겁고 먹먹했다.
남원군 부친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으나 나이가 들어 자식들에게 부끄러움을 남기게 된 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겠는가?
“소신 감히 청하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시어, 대감 어르신의 결백을 밝혀 주시옵소서!”
한 무장 장수가 나서더니며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신도 청하옵니다!”
“소신 또한 동의하옵니다!”
모든 하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이 순간, 그들은 진심으로 믿었다. 남원군 부친이 살아 있는 한, 남원군 일가가 산적과 결탁하여 백성을 해칠 리 없다는 것을.
소희연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고육지책을 정말 절묘하게 써먹었군!’
먼저 대의를 위해 자식을 단죄하고, 이어서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단 몇 마디로 자신과 가문을 완전히 분리해 냈다.
단순히 가문의 체면을 지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태자를 압박하여 반드시 수사에 나서게끔 만든 것이다.
소희연은 속으로 확신했다. 남원군 일가가 호랑산의 산적들과 결탁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일 뿐이라고.
이 모든 것은 신홍철의 이기적인 행동이 불러온 사달이었다. 우연히 약점을 잡히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원군 부친 역시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을 터.
신홍철은 그의 친아들이 아닌가. 그의 성정을 모를 리 없다.
아무리 대담하다 한들, 신홍철이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산적들과 결탁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태자가 조금만 조사해 본다면, 진실은 저절로 밝혀질 것이었다.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제가 있는 이상, 반드시 진상을 규명할 것입니다.”
태자가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태자 전하.”
그제야 사람들이 허리를 펴고 자리로 돌아갔다.
“조 대감.”
태자는 조성위를 바라보았다.
“남원군이 공개적으로 산적이 노비라고 인정한 것 외에, 남원군 일가가 호랑산과 결탁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소?”
조성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남원군 일가를 의심한 이유는 단지 남원군의 한마디 때문이란 말이오?”
태자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태자 전하, 소신이 명령을 내리기 전, 이미 남원군에게 여러 차례 확인하였사옵니다. 그러나 남원군은 한사코 산적이 신씨 일가의 노비라고 주장하였고, 소신 또한 달리 방도가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일단 남원군을 연루된 자로 간주하고 감시하던 것이옵니다.”
조성위가 공손히 답했다.
그의 조치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신홍철이 스스로 인정한 데다, 누군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 증언이었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어느 대신이라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한편, 신홍철은 피가 흐르는를 흘리는 머리를 감싸 쥔 채 한쪽에 서서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 나리...”
소실 홍씨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고통에 찬 얼굴로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신홍철은 그녀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후회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태자는 신홍철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남원군, 변명할 것이 있소?”
신홍철은 창백한 얼굴로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태, 태자 전하...”
“왜 저 산적이 신씨 일가의 노비라 한 것이오? 정말 여기서 일하는 하인이오?”
태자는 침착하게 물었다.
“아, 아니옵니다... 저자는 이곳에서 일하는 하인이 아니옵니다. 태자께서 확인하셔도 되옵니다. 저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사옵니다. 저는 그저 변명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옵니다!”
신홍철은 부인하였고,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태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변명을 하였소?”
신홍철은 잠시 침묵하였다.
태자는 그가 말하려다가 멈추는 모습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숨길 것이 무엇이오? 감옥에 갇혀야만 입을 열겠다는 것이오?”
“아니옵니다. 사실대로 말하겠사옵니다!”
신홍철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떨며 모든 것을 쏟아냈다.
“다 제 욕심 때문이옵니다. 그 산적이 경조부에 잡혀가면 제 처가 사주한 살인 사건이 밝혀질까 두려워, 저희 집안의 명예가 더럽혀질까 봐 숨기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옵니다. 사람을 잡아두려 했을 뿐이온데 저자가 산적이라는 것을 저는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그저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였사옵니다. 저는 정말 억울하옵니다. 저희 집안과 산적은 아무 관계가 없사옵니다!”
신홍철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리...”
소실 홍씨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자신이 큰 재앙에 처했음을 깨달은 홍씨는 정신이 무너져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진실이 드러났다.
사주 살인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산적과의 연관은 단순한 오해에 불과했다!
남원군의 부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체면을 잃은 것만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목숨을 잃은 것보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소실 홍씨와 신경혜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되자 잠시 말을 잃었다.
원래는 가문의 치부에 불과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커지게 될 줄은 몰랐다.
태자도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의 고위층 가문들에는 대개 이런 가정의 싸움이 존재했으나, 외부로 드러나는 일은 드물었다.
가문의 치부는 결코 밖에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다.
태자는 본래 이런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으나, 상황이 그에게까지 드러난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태자는 불쾌감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사주 살인 사건은 어찌 된 일이오?”
조성위가 대답했다.
“그건 셋째 아가씨께 물으셔야 할 일이옵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다시 소희연에게로 쏠렸다.
남원군 부친의 차가운 경고의 눈빛을 받아들인 소희연은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다시 풀어냈다.
그런데 신홍철은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격렬하게 반박했다.
“태자 전하, 저그 말을 믿지 마시옵소서! 제 처는 분명 저 산적을 본 적이 없다고 했사옵니다!”
신홍철은 소희연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
“저자가 산적을 매수하여 소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사옵니다!”
승원 대군의 팔을 꼭 붙잡고 있던 신옥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도 증언할 수 있사옵니다. 나흘 전, 어머니는 계속 저와 함께 계셨고, 밖에 나가신 적이 없으셨사옵니다.”
그러고는 승원 대군의 팔을 힘껏 흔들며 말했다.
“대군 마마, 뭐라도 말씀해 보십시오.”
태자는 차가운 눈빛을 그녀에게 던졌다.
승원 대군은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고, 신옥혜를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묻지 말거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대군 마마.”
“신경혜, 선영이는 비록 내 본처는 아니지만, 너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다. 네가 그리하여 산적을 매수하고 선영이를 모함했다면, 그 마음이 정말 악독하다고 할 수 있겠지. 태자 전하께서 계시니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신홍철은 소희연을 향해 맹렬히 비난하면서, 태자를 압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