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그는 고진우의 친구인 장우민이었다.
전에 술자리에서 이소현이 안쓰럽다고 얘기했던 사람이었다.
알고 지낸 지 3년 동안 이소현은 장우민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답했다.
“물건 사러 왔어.”
장우민은 그녀의 손에 들린 봉투를 힐끔했다.
“진우한테 주려고 산 선물이야?”
해명하기 귀찮은 이소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브랜드 시계가 가격이 꽤 나갈 건데. 기본 디자인이라 해도 몇백만 원은 들 거야. 이렇게 비싼 선물 안 사 줘도 돼. 고진우는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 못 돼...
고진우는 자기 입으로 주하영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고 또 이소현을 대체품으로 삼는다고 인정했었다.
게다가 어제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소현을 제쳐두고 주하영의 손을 잡은 채 룸을 나섰었다.
고진우와 주하영이 떠난 후 호텔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었다는 사실을 이소현은 몰라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만 모인 단체 그룹 채팅이 있었던 것이다.
이소현은 고진우와 연애를 한 지 3년이 돼 가는데도 그 그룹 채팅에 들어간 적이 없었었다.
그런데 주하영이 귀국하자마자 고진우는 그녀를 그룹으로 초대했었다.
오늘 점심 주하영은 그룹 채팅에 두 사람의 침대 사진을 올리며 고진우한테 기념으로 잘 보관하라고 했었다.
허나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주하영은 잘못 보냈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 사진들을 삭제했었다.
마침 그 사진을 확인했었던 장우민은 뭐라 귀띔을 하고 싶었지만 친구의 일이니 괜히 참견하지 않는 게 좋다고 느꼈었다.
이 많은 일들을 회상하며 이소현한테 그만 포기하라고 권하고 싶었던 장우민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바꾸었다.
“고진우는 이런 물건들 많아. 굳이 몇 달 월급을 써 가며 이렇게 비싼 선물을 사줄 필요 없어.”
고진우하고 십여 년 지기 친구라 그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이소현이 몇 달 월급으로 선물을 사 봤자 고진우가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상처가 되는 말이니 그 말은 그저 삼켜버려야만 했다.
이소현도 고진우가 이러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한테 주는 선물도 아니고 말이다.
그녀는 예의 있게 미소를 보였다.
“알겠어.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을게.”
이소현은 장우민하고 조금 더 담화를 나누었다.
장우민은 이소현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어휴, 얼마나 착한 여잔데 어쩜 고진우를 만나 상처만 받는 건지.”
그는 카카오톡을 열어 고진우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진우야, 네 여자친구한테 잘해. 방금 너한테 시계 골라주러 왔더라. 몇백만 원이나 하는 시계를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더라고. 몇 달 월급을 다 썼을 텐데 소중히 여겨.”
주하영과 식사를 하고 있던 고진우는 그 메시지를 보자 방금 전 치밀었던 화가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의 표정 또한 부드러워졌다.
그녀도 오늘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사죄의 의미로 선물을 산 걸 테니 그는 그녀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의 선물을 받아주는 동시에 그도 방금은 자신의 태도가 지나쳤다며 사과를 하고는 잘 달래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소현한테 이러한 사과 공세가 제격이다.
“진우야, 왜 그래? 누구 메시지야?”
맞은편에 앉은 주하영이 물었다.
고진우는 휴대폰을 거두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주하영도 더 캐묻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진우는 화장실로 향했고 주하영은 책상 위에 놓인 그의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전에 그가 비밀번호 입력하는 걸 엿봤던 적이 있었고 기억하기 쉬운 그의 생일이었다.
주하영은 그의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어보았다.
가장 먼저 열어본 대화창은 이소현과의 대화였고 그들의 대화 내용은 일주일 전에 멈춰있었다.
이소현은 휴가에 같이 여행 가면 어떠냐고 제안하며 자기 멋대로 관광지 사진들을 보내왔었다.
고진우는 5시간이 흘러서야 휴가에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볼거리가 없을 거라는 답장을 했었다.
주하영은 이소현이 보내온 관광지 사진들을 살펴보며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두 사람이 연애한 3년 동안 사이가 그다지 돈독하지도 못하네...
고진우가 여행도 같이 가주지 않으니...
주하영은 그 대화창에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자 대화창을 나와 얼떨결에 장우민의 메시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주하영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이틀 전 마주쳤을 때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여서 이소현이 포기한 줄 알았는데 선물 공세로 고진우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했으니 말이다.
주하영은 카카오톡 화면을 나와 휴대폰을 잠그고 다시 원상태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고진우의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방금 진우하고 반지를 맞추러 가던 길에 진우가 사귀는 여자친구를 만나게 됐었어요. 그분이 매장에서 반지 착용하면서 진우한테 결혼을 강요하더라고요.”
이소현은 선물을 들고 별장으로 돌아와 계속하여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지태한테 주려던 선물을 캐리어에 담았고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준수한 강지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강지태하고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두 사람의 저택이 같은 지역에 위치해 있기도 했고 거리는 3백 미터 정도에 불과했던 터라 자주 마주치곤 했었다.
강지태는 그녀보다 네 살이 많으며 강씨네 저택에서 처음 그를 만났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손님으로 초대받았을 때 그녀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녀는 10살이었었다.
허나 강지태는 청춘 드라마에서 볼 법한 주인공처럼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소현은 강지태를 처음 봤을 때 화들짝 놀랐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공격성을 지닌 준수한 외모에 그의 눈빛은 차가운 얼음을 머금은 듯했었다.
어머니가 그녀더러 그를 칭하라고 했을 때 그녀는 예의 있게 ‘지태 오빠’라고 불렀었다.
기억 속으로는 강지태가 무뚝뚝한 말투로 ‘안녕하세요’라고 답했었다.
그때는 이 오빠와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렇게 그 오해가 몇 년을 이어갔었다.
그러다 나중에 그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수학 성적이 뒤떨어지자 강여사님은 들리는 소문으로 인해 이석동한테 건의를 했었다.
“지태한테 우리 소현이 수학을 배워달라고 합시다. 지태가 고등학교 때 수학을 140점 넘게 받았었대요!”
그때는 엄마가 벌써 사망을 하신 지 오래였고 이소현의 성격은 어릴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이소현은 근심 걱정 하나 없는 해맑은 여자아이에서 과묵하고 반항적인 소녀로 성장했었다.
“배워주지 않아도 돼.”
강지태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녀가 건넨 첫마디였다.
그때의 강지태는 스물한 살이었고 185 정도 되는 훤칠한 키에 하얀 반팔티와 짙은 회색 청바지 차림으로 소년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난 가르칠 건데.”
그의 답은 웃음기와 진지함이 물들어 있었다.
이소현은 강지태가 분명 엄격하고 단호하게 가르칠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수학 시험지를 지켜보던 그는 잠시 이마를 찌푸리더니 이내 인내심 있게 차근차근 그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한 문제씩 풀어나가다 보니 강지태의 표정은 차분해져 갔다.
그의 자성을 띤 저음은 귀를 호강시켰고 이소현은 들으면 들을수록 반감이 사라져갔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저항심이 가득했던 이소현의 눈빛이 점차 존경심이 문뜩 드러나고 있었다.
“우와, 강지태 대단한데!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언젠데 다 기억하는 거야?”
“전부 다 기억하는 건 아니야. 오기 전에 교과서 훑어봤었어.”
말을 마치고 난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연필로 그녀의 머리를 두드렸다.
“넌 철도 없어! 앞으로 지태 오빠라고 불러.”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강지태는 두 달 동안 이소현한테 수학을 가르쳤었다.
그때의 강지태는 강성 대학에서 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는데 여름 방학 내내 어디도 놀러 가지 않았었다.
하루 종일 이소현한테 문제지를 설명해 주거나 시험지 채점 과제를 도와주곤 했었다.
고등학교의 여름 방학 기간이 워낙 짧은 터라 그녀는 등교를 하게 되었는데도 강지태는 여전히 휴가 중이었다.
하여 매번 하교할 때면 강지태가 그녀의 집안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강지태 덕분에 그녀의 수학 성적은 월등히 향상되었고 불합격에서 130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소현의 다른 과문 성적은 워낙 좋았고 수학 성적마저 걱정이 없게 되자 순조롭게 강성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강지태의 대학 후배가 되었다.
그 당시 이소현은 강지태를 자신한테 친절히 대하는 옆집 오빠라 여겼었다.
그를 우러러보며 존경하는 마음 외엔 남녀의 정이 존재한 적이 없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강씨네 집안과 혼사를 맺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그 혼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오빠라 여겼던 남자와 결혼이라니?
추억에 사로잡혀 있던 그때 침실 문이 열렸고 고진우는 입구에 서서 이소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물건들 다 정리했어?”
“응. 거의 다 정리했어.”
고진우는 문틀에 기대어 말을 건넸다.
“소현아, 나한테 뭐 할 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