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그녀는 강지태한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곧 전화를 받았고 강지태는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소현아, 그 세 벌이 마음에 드는 거야?”
“응.”
이소현이 답했다.
“오빠는 어느 드레스가 더 예쁜 것 같아?”
전화 너머로 강지태가 웃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마음에 들면 세 벌 다 사라니까! 비서한테 드레스 세 벌 모두 주문하라고 했어.”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주문한 거야?”
강지태가 답했다.
“한정판이잖아. 늦으면 주문하지 못할까 봐 미리 주문한 거야.”
“알았어. 오빠가 고생이 많네.”
“소현아, 넌 이제 오빠 약혼녀야. 한 집안 식구끼리 뭐 하러 예식을 차리고 그래.”
틀린 말이 아니긴 해도 아직 그녀는 약혼녀라는 신분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녀한테 있어서 강지태는 여전히 친절한 옆집 오빠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참, 소현아, 해성시에서 택시 잡고 다니려면 불편할 것 같아서 차 한 대 새로 장만했거든. 수속을 다 마쳤으니까 주소 적어줘. 그리로 보내줄게.”
그 말을 듣고 나자 이소현은 괜히 미안해졌다.
강지태와의 혼사를 필사적으로 반대하며 집에서 가출해 나온 후 이석동이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켰다는 걸 강지태는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성시에서 차도 집도 없는 그녀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처럼 생활해 왔었다. 두 절친이 그녀한테 경제적으로 충족한 도움을 주겠다고 했었지만 이소현은 전부 거절했었다.
그렇게 처음 두 달 동안만 절친의 도움으로 생활고를 이겨나갔지만 나중에 일자리가 안정된 후로는 절친의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차근차근 그 돈들을 갚아나갔고 말이다.
분명 그와 약혼하지 않겠다며 해성으로 도망쳐 온 건데 강지태는 그녀를 질책하지도 않고 되레 그녀한테 차를 사주고 있으니 부끄러운 마음에 이소현은 손바닥을 움켜쥐게 되었다.
“아니야. 택시 잡고 다니면 돼.”
강지태의 말투에는 가늠이 안 갈 정도의 상처가 깃들어 있었다.
“소현아, 여전히 나하고 약혼할 마음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내 호의를 거절하는 거야?”
이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허나 잠시 후에야 그들은 통화 중이라 강지태는 그녀의 표정과 행동을 직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해명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약혼할 마음이 없었으면 이 혼사에 동의하지도 않았어. 그냥 며칠 뒤에 강성으로 돌아갈 건데 굳이 지금 차를 타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강지태가 답했다.
“괜찮아. 네가 강성으로 돌아올 때 차 가져오면 돼.”
“그래도...”
이소현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며칠 뒤에 주변 도시에서 재판 열러 가는 거 아니야? 운전해서 가면 편할 거야.”
이소현은 다소 충격이었다.
“며칠 뒤에 재판 열린다는 걸 오빠는 어떻게 알았어?”
“두 달 전에 인스타에 올렸었거든.”
이소현은 어리둥절했다.
두 달 전에 며칠 뒤에 열리는 재판 시일을 확정 지은 건 사실이었다.
9월 25일, 장소는 주변 도시의 중원이었다.
그때 그녀는 즉흥적으로 공비 여행을 간다며 인스타에 사진을 업로드 했었고 재판이 끝난 뒤 그 도시에서 맛있는 쌀국수도 먹고 유명 관광지에 가서 인증사진도 찍을 거라며 한껏 들떠 있었다.
강지태는 다정한 웃음기를 머금고 답했다.
“운전해서 가면 훨씬 편해. 재판 끝나고 관광지 구경도 하면 좋잖아.”
같은 시각 강지태는 그룹 빌딩 꼭대기의 대표 사무실 통유리창 앞에 서서 물처럼 부드러운 눈빛으로 수많은 가정집 불빛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년 전 해성에서 이소현이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한테 집과 차를 장만해 주고 돈을 두둑이 챙겨주고 싶었었다.
허나 그때의 그는 적당한 신분이 없었던 터라 그녀가 그의 호의를 거절할 게 뻔했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녀가 혼사에 동의도 했으니 마침내 약혼자라는 정정당당한 신분으로 그녀한테 선물 공세를 펼칠 수가 있었다.
강지태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있는 이소현은 마음이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작은 돌멩이가 잔잔한 호수에 떨어져 가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인스타 사진들은 3일 뒤면 자동 잠금이 되는 형식이라 그녀 스스로도 업로드했던 내용들을 까먹곤 하는데 강지태가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진우는 종래로 그녀가 업로드했던 내용들에 관심이 없었다.
때때로 분명 출장 가기 전에 미리 고진우한테 알렸는데도 출장을 간 날이면 고진우는 왜 그녀가 해성에 없는 거냐며 노발대발하기까지 했었다.
예전에 고진우한테 어디로 여행 가고 싶다며 여러 번이고 얘기했지만 고진우는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그로 인해 2년 전에 고진우하고 함께 가고 싶었던 그 여행지를 지금까지도 가보지 못했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신경 써주고 있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이소현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고 고진우 별장 주소를 적어주었다.
강지태가 물었다.
“내일 오전에 집에 있는 거지?”
“있어.”
통화를 끊고 얼마 되지 않아 고진우는 주하영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올 때 이소현은 1층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소현은 여광으로 그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진우도 입을 열지 않았고 뜻밖에 주하영이 먼저 말을 건넸다.
“이소현 씨, 여기서 또 만나네요.”
한가로운 자세로 소파에 기대고 있는 이소현은 텔레비전 속 법제 프로그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의 인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주하영은 화가 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다가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소현 씨, 평소에 이런 프로그램을 즐겨 보나 봐요.”
고진우가 말을 내뱉었다.
“샤워하러 갈게.”
누구한테 말인지도 불분명한 말을 남긴 채 그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동영상 보셨죠?”
고진우가 떠난 걸 확인하자 주하영은 웃음을 거두고 금세 다른 눈빛으로 변해버렸다.
“진우가 사랑하는 여자는 저예요.”
고진우가 누굴 사랑하던 관심이 없는 이소현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성의 없이 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불쾌하기만 한 주하영은 경멸심을 드러냈다.
“침착한 척 연기를 아주 잘하시네요.”
이소현은 싸늘하게 답했다.
“그쪽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하.”
주하영은 콧방귀를 뀌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진우야, 나하고 같이 씻자.”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린 주하영은 이소현한테 도발적인 눈빛을 쏘아붙였으나 이소현은 그녀한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고진우하고 주하영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이소현만 단독으로 덩그러니 자리를 잡았다.
장씨 아주머니는 배추 볶음 요리를 내려놓았다.
“식사 준비 끝났어요.”
이소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머니, 오늘은 요리가 이것뿐이에요?”
배추, 상추, 공심채, 브로콜리, 오이무침.
고기 하나 없는 야채 요리들뿐이었다.
고진우가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하영이가 좋아하는 요리들이야.”
“야채를 좋아한다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녹색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던데.”
“이소현! 왜 또 시비야?”
고진우는 약간 분노가 서려 있었다.
“조용히 밥이나 먹지 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소현은 고진우의 목에 시선을 옮겼더니 그 흔적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주하영은 일부러 그녀한테 보여주기식으로 그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이소현은 화가 나 있는 그 남자를 활짝 웃으며 쳐다보았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누구보다 네가 잘 알겠지?”
고진우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 먹을 거면 방에 돌아가. 그리고 하영이 며칠 동안 지낼 곳이 없어서 여기서 지내게 될 거야. 앞으로도 우리는 채소 요리들만 먹을 거니까 다른 걸 먹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챙겨 먹어.”
아주머니한테 두 가지 고기 요리를 부탁하면 될 일인데도 그마저도 고진우는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에 채소를 그다지 즐겨 먹지도 않는 고진우는 고의적으로 그녀를 난처하게 하려는 심산이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고진우는 싫어하는 채소마저 먹기 시작하는 걸 보면 그 정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시계의 일로 고진우가 화가 났다는 걸 알지만 이소현은 해명하고 싶은 생각도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녀가 잘못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달시키면 그만이다.
다음 날 강지태의 차가 입구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