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대표님...”
육현우는 이지영을 안은 채로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병원으로 가.”
“네.” 한승호는 더 묻지 않고 바로 1층 버튼을 눌렀다.
한승호는 차를 가지러 갔고 임하나와 육현우는 제자리에 선 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육현우는 아직도 품에 이지영을 안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자 이지영은 추위에 벌벌 떨었는데 그런 그녀를 더 꽉 안은 육현우의 모습이 그대로 임하나의 눈에 담겼다.
차가 도착하자 임하나는 뒷좌석 문을 열어 육현우와 이지영을 먼저 타게 했다.
그녀와 달리 육현우는 이지영과 임하나 두 사람을 뒷좌석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이지영을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잠에서 깼다. 그리고 울어서 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걸 본 임하나는 알아서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차가 달리는 내내 임하나는 창밖을 스쳐 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육현우는 이지영을 안은 채 다급하게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임하나는 빠른 걸음으로 뒤따랐다.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이지영은 알코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것으로 판명되었다. 링거를 맞은 이지영은 곧 깊은 잠에 빠졌다.
한참 후 한승호가 다가오더니 이지영의 상태에 대해 물어본 뒤 육현우에게 말했다. “서 대표님이 크게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서 사과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육현우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지 실눈을 떴다. 하지만 거액의 프로젝트가 달린 문제라 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임하나에게 물었다. “저녁에 다른 일 있어요?”
임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자 여기 두면 마음이 안 놓여서요. 혹시 지영 씨를 잠깐 돌봐줄 수 있어요?” 육현우는 회사 대표였지만 진정성 있게 임하나에게 부탁했다. 임하나도 차마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네, 그러죠.” 임하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육현우가 한승호를 데리고 떠났다.
이지영은 링거를 맞고 있어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에 임하나는 그 옆에 앉아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밤이 깊었지만 임하나는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새벽에 이지영이 잠에서 깨고는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나 씨.”
임하나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깼어요?”
이지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나 지금 병원에 있는 거예요?”
“네.”
그리고 또 임하나를 보며 물었다. “대표님은요?”
“대표님과 총괄 비서님은 찻집으로 돌아갔어요. 물 필요해요?”
이지영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술이 깨서인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갑자기 임하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나 씨, 오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거죠? 네?”
임하나는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무슨 일이요?”
“나랑 대표님 일 말이에요.” 이지영이 거침없이 말했다. “오늘 밤 대표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 씨도 들었죠?”
임하나는 목이 약간 메어 올랐다. “지영 씨와 대표님...”
“나 대표님과 연애한 지 1년 되었어요.” 이지영이 말을 이어갔다. “회사로 들어오자마자 연애를 시작했어요. 다만 사내 연애가 금지되어 있어 몰래 만나야 했는데 이번에 결국 하나 씨에게 들키고 말았네요...”
그 말을 들은 임하나는 충격과 괴로움에 휩싸였다.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그날 밤에는 왜 내 몸에 손을 댄 것일까? 설마 날 이지영으로 착각한 걸까?’
그 생각에 임하나는 더욱 괴로워졌다.
“하나 씨.” 이지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표님은 나와 당당하게 만나기 위해 내가 회사를 그만두길 바랐어요. 하지만 내가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미뤘던 거예요. 이제 나도 마음을 정리해서 회사를 그만두려고요. 하지만 이 일을 아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요. 대표님에게 영향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하나 씨, 꼭 비밀 지켜줘요. 네?”
임하나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이지영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하나 씨.”
...
그날 밤, 임하나는 밤을 새웠다.
전에는 링거를 맞은 이지영을 돌보느라 눈을 못 붙였고 이지영의 말을 듣고 난 후에는 눈을 감기만 하면 그날 밤 텐트에서 있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임하나는 밤새 혼란 속에서 보냈다.
날이 거의 밝을 때, 임하나는 발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육현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안 잤어요?” 육현우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그녀를 보더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든 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침 가져왔어요. 수고 많았어요.”
임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표님이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하나 씨.” 육현우가 그녀를 불렀다. “아침은 가지고 가요.”
임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요. 지영 씨에게 드려요.”
말을 마친 후 그녀는 문을 열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면서 외부의 빛과 그림자가 차단되었다. 어둑한 실내조명은 그의 눈을 불편하게 했다. 물론 술기운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여 그는 다소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
시간은 아직 일러서 임하나는 기숙사로 돌아간 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오늘 육현우와 이지영 모두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거의 점심시간이 다가왔을 때 임하나는 안은실이 이지영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들었다. “병원에 있다고? 어디 아파?”
이지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안은실이 또 물었다. “어느 병원에 있어? 내가 보러 갈게.”
잠시 후 또 말했다. “아... 알겠어. 그럼 푹 쉬어. 무슨 일 있으면 문자해.”
전화를 끊은 후 안은실은 컵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임하나를 발견했다.
안은실은 도도하게 걸어오더니 임하나 옆을 지날 때는 일부러 비켜서지 않고 그대로 그녀와 부딪쳤다.
“아!”
뜨거운 물이 임하나에게 쏟아졌지만 비명을 지른 사람은 안은실이었다.
임하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은실은 팔을 들어 임하나의 싸대기를 때렸다.
짝!
임하나는 반응할 새도 없이 그대로 안은실에게 맞았다.
“눈 똑바로 뜨고 다녀요. 내 옷이 얼마나 비싼지 몰라요?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요. 물 묻으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안은실은 다짜고짜 화를 냈다.
그녀의 목소리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임하나는 화나기도 했고 황당하기도 했다. “분명 그쪽이 먼저 부딪쳤으면서...”
임하나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금방 안은실의 큰소리에 묻혔다. “말해요, 어떻게 배상할 건데요?”
임하나는 말문이 막혔다.
“안은실 씨, 또 무슨 일이에요?”
한승호는 서류를 든 채 걸어왔다. “멀리서부터 안은실 씨 소리를 들었어요. 경고하는데 요즘 대표님 기분이 안 좋으시니까 말썽을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하지만 안은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심한다고 달라지기나 해요? 대표님은 인턴을 더 중히 여기면서 오래된 직원들에게는 기회를 안 주잖아요. 이런 부서에 머무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안은실 씨!” 한승호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으면 사직서 내면 돼요.”
안은실도 홧김에 한 말이라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한승호가 또 말했다. “회사에 계속 있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요. 매일 말썽을 부리며 회사 분위기 망치지 말고.”
안은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승호에 대꾸할 수는 없었지만 임하나만큼은 만만했다. “이 원피스 800만이니까 꼭 배상해요.”
한승호는 임하나를 힐끔 보다가 말했다. “됐어요. 하나 씨 옷도 망가졌잖아요. 퉁쳐요.”
“퉁치라고요? 총괄 비서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이 원피스 800만 원이라고요. 저 사람이 입은 옷은 8만 원도 안 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퉁쳐요?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저 사람 옷 배상할 테니까 내 원피스도 꼭 배상하게 해요.”
안은실이 말을 마치자마자 임하나가 입을 열었다. “배상 안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