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이지영의 흰 피부에 드러난 멍들은 꽤 시간이 지났는지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걸 발견한 육현우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이지영을 빤히 쳐다보면서 무섭도록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 멍들은 어떻게 생긴 거예요?”
“대표님...” 이지영은 겁을 먹은 듯 다급하게 손으로 옷을 여미면서 눈을 피했다.
육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물었다.
“말해! 멍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잖아!”
이지영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승호!” 육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남아서 상황을 수습해.”
“네, 알겠습니다.” 한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현우는 이지영을 끌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
임하나는 스위트룸 안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지영 씨.”
육현우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은 채 이지영을 끌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펑!
방문이 세게 닫혔다. 육현우는 문까지 잠근 듯했다.
임하나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화면이 스쳐 지나갔다. 육현우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고 그에게 끌려 들어간 이지영은 옷이 흐트러지고 눈이 빨개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신 듯했는데 이지영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방 안에서 이지영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임하나는 그릇을 내려놓은 후 방문 앞으로 가서 문에 귀를 대자 이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대표님...”
“벗어!” 육현우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찼다.
이지영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임하나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몰랐지만 손으로 문을 세게 두드렸다. “대표님!”
“아!” 방 안에서 이지영의 비명이 들렸다. “대표님, 그러지 마세요... 대표님...”
임하나는 갑자기 문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얼굴에 뭐가 흐르고 있는 듯해서 손으로 닦았는데 그제야 임하나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을 마신 성인 남녀가 단둘이 방 안에 있었다. 게다가 방금 두 사람이 한 얘기까지 종합하면 지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임하나는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녀는 문밖에서 잠시 서 있다가 스위트룸을 나섰다.
방 안에서. 셔츠를 벗은 이지영은 속옷 하나만 입고 있었다.
육현우는 그녀 앞에 선 채 그녀의 몸에 난 깊거나 얕은 멍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머릿속에는 그날 밤의 뜨거운 장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지영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후 그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밤 여자가 지영 씨였어요?”
이지영은 몸을 부둥켜안고 소리 내 흐느꼈다.
인정한 셈이었다.
육현우는 걸려있던 코트를 챙기고는 이지영에게 건넸다. “먼저 옷 입어요.”
이지영이 그가 건넨 옷을 걸치자 육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게 뭐예요?”
이지영은 잠시 멈칫하다가 바닥에 철썩 무릎을 꿇었다. “대표님, 그날은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요. 대표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저도 의도한 게 아니고요... 이 일을 절대 말하지 않을 거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대표님, 그저 저 자르지만 마세요.”
육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책임질게요. 하지만 지영 씨도 알다시피 회사는 사내 연애 금지예요. 그러니 꼭 사직서 내요. 나중에 승호가 데리러 갈 거예요.”
이지영은 눈을 크게 떴다. “대표님...”
‘그러니까 날 여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싫다면 계속 회사에 남아있어도 돼요. 대신 보상금 줄게요.”
육현우는 그날 밤 상대가 얼마나 서툴렀는지 똑똑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튿날 아침 이불에 묻은 빨간 핏자국을 발견했었다. 일을 저지르고 책임을 회피하면 육현우가 아니었다. 이미 사람을 찾았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날 밤 육현우는 상대가 꽤 마음에 들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그가 빨리 결혼하길 바랐다. 전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이지영에게 기회를 한 번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네, 그럴게요!” 이지영이 말했다. “대표님을 위해 한스 그룹을 그만둘 수 있어요.”
“좋아요.” 육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임하나는 찻집을 나서고서야 이곳이 시내와 몇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라 전용차로 와 택시를 잡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지쳤는데 갈 데가 없어 분수대 옆에 잠깐 앉았다.
“처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하나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진우석을 발견했다.
진우석은 정장을 입은 남자 몇 명과 함께였다. 그들은 임하나를 보자 발걸음을 멈추고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봤다.
“형부.” 임하나는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대답했다.
진우석이 물었다. “왜 여기 있어?”
“대표님 따라왔어요.” 임하나가 솔직하게 말했다.
진우석은 찻집을 한 번 보더니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이 여기서 사업해?”
“네.”
진우석은 몇 마디 더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때 한승호가 다가왔다. “하나 씨, 왜 여기 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임하나의 눈가는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총괄비서님, 저 바람 쐬러 나왔어요. 걱정하게 해서 죄송해요.”
“빨리 돌아가죠. 대표님 기다리고 계세요.” 한승호가 말했다.
“알겠어요.”
임하나가 떠나려 하자 진우석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한 비서님?” 진우석은 한승호를 보다가 또 임하나를 보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언니가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던데. 설마 한스 그룹에 간 거야?”
임하나는 한스 그룹에 간 일을 진우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언니 임하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임하나는 진우석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밖에서 자신이 한스 그룹에 다니고 있다는 걸 자랑하고 다닐까 봐 입을 꾹 닫았던 것이었다.
방금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임하나가 어쩔 수 없이 대답한 것이었다.
진우석은 바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처제, 잘했어. 한스 그룹에 갔는데 왜 나랑 언니한테 말하지 않았어? 축하할 일이잖아.”
“정직원 되면 말하려고 했죠...”
“대표님이 처제를 데리고 사업하러 온 걸 보면 처제를 믿는다는 거잖아. 언젠간 정직원이 되겠지. 처제, 얼마나 잘됐어? 저녁에 바로 언니한테 말해야지, 언니가 엄청 좋아할 거야.” 진우석은 또 한승호를 보며 말했다. “총괄비서님, 안녕하세요. 저는 W.S 그룹의 진우석이라고 합니다. 임하나 씨 형부이기도 하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승호는 그가 건넨 명함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임하나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었다.
...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한승호가 물었다. “방금 그 사람, 정말 형부예요?”
“네.” 임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승호가 또 물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한테서 얘기는 들었어요.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요.”
한승호가 말하지 않아도 임하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한승호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한 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총괄비서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 임하나가 물었다.
한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은 저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해요. 계속 한스 그룹에서 일하고 싶다면 앞으로 형부와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하나 씨까지 대표님 눈 밖에 날 수 있어요.”
임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지영을 안은 육현우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