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최성훈이 제시한 조건을 들은 소윤정은 충격받아 동공 지진이 났다.
소윤정은 눈을 부릅뜨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20억의 손해 배상? 잘못 들었나? 아니면 성훈 씨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헤어질 때 모두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비를 주는 거였는데... 돈도 많으면서 나한테 청춘 손해 배상을 하라니! 왜 나가 죽지 않고! 남자로서 어떻게 뻔뻔하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거지?’
소윤정은 그의 말에 놀라서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최성훈은 눈앞에서 놀란 여자의 반응을 보고 입꼬리를 치켜세우고 넥타이를 정리하며 당당한 태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윤정은 최씨 가문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일해 본 적이 없었는데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20억은 그녀가 다시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하기 충분했다.
‘이 결혼에 언제 윤정이의 의사가 중요했나?’
소윤정은 최성훈의 말에 충격을 받아 무려 1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실망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20억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해 볼게요. 하지만 하준이의 양육권은 제가 반드시 가져야겠어요.”
소윤정은 최성훈이 그녀의 상황을 눈치채고 일부러 그녀를 무시하기 위해 20억이라는 큰돈을 불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최성훈은 사각지대가 없는 얼굴로 어느 각도에서 보든 빈틈이 없었고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몸매도 좋고 키도 커서 연예계에 진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미 톱스타가 되었을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어린 남자들은 그에게 비빌 틈도 없었을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환경에 있어도 그의 멋과 고귀한 분위기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최성훈은 소윤정에게 20억을 지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각박한 요구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소윤정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 단번에 승낙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소윤정의 눈에서 결단력을 보았다.
그런 눈빛은 그가 여태껏 본 적 없는 것이었고 낯선 눈빛이었다.
이어 최성훈의 손등에 차가운 기운이 스치더니 맑고 투명한 액체가 손등에 떨어져 서서히 피붓결을 따라 흘러내렸다.
무언가에 스쳤을 뿐인데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와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져 그는 소윤정을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성훈은 그녀의 곁으로 물러나 어깨를 나란히 했다.
키 큰 남자는 벽에 기대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손끝에서 담배가 새빨갛게 타오르며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소윤정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을 따라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벽에 좌우로 기대어 마치 그곳에 정해진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흐른 후,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담배를 던져 발로 세게 밟아 끄고는 소윤정을 향해 걸어왔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살기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윤정이 위험을 깨닫고 도망치려 할 때는 이미 늦었다.
몇 걸음 뛰기도 전에 그녀는 최성훈의 손에 잡혀 다시 벽에 밀쳐졌다.
소윤정이 발버둥 치기도 전에 그의 차가운 입술이 밀려왔다.
옅은 담배 냄새가 그녀의 콧구멍을 거칠게 파고들어 페포까지 퍼지며 사레가 들려 기침했다.
하지만 최성훈에게 입이 막힌 소윤정은 기침조차 자유로이 할 수 없었다.
방금 거두어들인 눈물이었지만 담배 냄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상태여서 눈물은 다시 흘러나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자는 먹빛 눈동자에 차가운 살의를 띠며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송이준한테 무슨 매력이 그렇게 많아?”
소윤정은 몸부림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입술을 되물으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니에요! 선배랑은 상관없어요. 저는...”
그다음 말은 모두 남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여자의 흐느낌 소리만 남았다.
사용인이 청소하러 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얼른 몸을 돌려 도망쳤다.
‘큰 도련님의 눈빛이 너무 무서운데...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아.’
“소윤정, 잘 들어. 이혼은 내가 말해야 의미가 있는 거야. 네가 하면 의미가 없어. 그리고 너는 나한테 이혼을 제기할 자격이 없어. 다시 한번 네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면 다시는 하준이를 볼 생각 하지 마.”
최성훈의 말은 마치 마귀가 내뱉는 말 같았고, 또한 무딘 칼로 살을 베는 듯했는데 점점 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지옥에서 온 악귀처럼 소윤정의 입술을 깨물었는데 그로 인해 피비린내가 두 사람의 입에서 퍼졌다.
최성훈은 소윤정을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더 맹렬히, 더 심하게 소윤정을 물었고 소윤정은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계속 밀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밀침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자의 욕망을 자극했다.
치맛자락은 그에 의해 허리 위로 밀려 길고 균형 잡힌 다리가 드러났는데 가녀린 다리는 매끈하여 매혹적인 광택을 발산했다.
5년 넘게 잠자리를 함께한 부부답게 최성훈은 그녀의 몸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뒤에는 차가운 벽이, 앞에는 남자의 뜨거운 몸이 가뜩이나 예민한 그녀의 몸을 자극했다.
이곳은 계단의 모퉁이였는데 사용인이 청소할 때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다. 그녀는 사용인들에게 들킬까 긴장하고 뻣뻣하게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최성훈에게 틈을 준 꼴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몸을 돌려 차가운 벽에 눌렀다.
소윤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욕설을 내뱉었다.
“최성훈, 제발 아무 곳에서나 발정하지 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인데 창피하지도 않아?”
뒤에 있는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조이고 있었다.
소윤정은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며 최성훈을 호되게 욕했다.
“개자식! 최성훈! 가 죽어!”
최성훈이 가소롭게 웃으며 답했다.
“너도 잘살고 있는데 내가 죽기는 왜 죽어. 왜? 한 번 더 하고 싶어?”
바스락 발소리가 들려오자 소윤정은 남들이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볼까 봐 급히 숨을 죽였다.
최성훈은 콧방귀를 뀌고 안하무인격이었다.
“다음에도 그런 말을 한다면 정말 하준이 못 볼 줄 알아.”
소윤정은 물에서 막 건져낸 동물처럼 몸을 웅크린 채 한 서린 눈동자로 구석에 서 있었다.
소윤정은 최성훈의 포악함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의 나약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허약하게 벽에 기대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성훈 씨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강수아 아닌가요? 이혼하면 당신은 정정당당하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데 좋지 않아요? 사랑하는 여자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