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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소윤정은 최성훈이 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수아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손에 쥐면 떨어질까, 불면 날아갈까 사사건건 조심하면서 사랑한다면서 왜 사랑하는 여자에게 명분을 주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가장 큰 존중이 그녀에게 명분을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전에 그녀는 자신이 노력해서 최성훈에게 잘해주면, 열과 성을 다하여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 최성훈의 마음이 돌로 만들어졌더라도 따듯함으로 녹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그가 강수아에게 어떻게 하는지 본 후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알게 되었다.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숨 쉬는 것조차 잘못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현실을 깨달은 소윤정은 이혼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최성훈의 어떤 점을 자극했는지 끈질기게 헤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그녀는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성훈 씨, 만약 당신이 강수아를 정말 사랑한다면 수아 씨한테 명분을 줘요. 함께하는 거야말로 가장 로맨틱한 고백인데 사랑하는 여자 곁에 영원히 있고 싶지 않나요?” 다급한 마음에 소윤정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진실을 알고 있는데 굳이 최성훈을 곁에 가둘 필요가 없었다. 손에 모래 한 움큼 쥐었을 때, 꽉 쥐면 모래가 더 빨리 흩어지는 것처럼 차라리 이대로 놓아주고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한 길인 것 같았다. “하!” 최성훈이 입꼬리를 핥으며 눈앞에 있는 창백한 여자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지금은 또 지금의 도리가 있네. 애써 나랑 결혼하려고 할 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어?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소윤정,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는데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어?” 눈앞의 여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물에서 갓 건져낸 애완동물 같았다. 그럼에도 소윤정은 집요하게 그를 쳐다보며 꼭 헤어져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참 우스웠다. ‘내가 언제 여자에게 이렇게 놀아난 적이 있던가? 소윤정이 결혼하자고 하면 하고 이혼하자고 하면 해야 하나? 대체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눈앞의 여자가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게 아니었다면 최성훈은 정말 다시 한번 관계를 맺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최성훈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이 된 소윤정은 계속 매달리지 않고 벽을 짚고 똑바로 서서 치마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발을 내디디자, 다리가 후들후들해지며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세게 넘어질 거로 생각했을 때, 힘센 팔 하나가 허리를 감싸며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잡아주었다. 소윤정은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며 말했다. “같잖은 호의는 필요 없어요!” 입으로는 차갑게 내뱉었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따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천성이 냉담하고 누구에게나 차가운 사람이 이혼을 원하지 않고 위험할 때 나를 끌어안아 줬으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해도 되나?’ 최성훈이 뭐라 답하려 할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들자 화면에는 강수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전화가 오자 최성훈은 감전된 것처럼 소윤정을 놓고 바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아야.” 분명 웃지 않았는데 소윤정의 눈에는 눈부신 웃음처럼 보였다. 가슴속에 떠오른 따스한 기운이 빠르게 스러지고 차가움만 남았다. 그녀는 기대를 억누르고 벽을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위층으로 향했다. 결연히 걷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유달리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다. 강수아는 사실 멀리 가지 않고 최성훈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최성훈은 그녀를 찾지 못했고 비가 내리자 그녀는 할 수 없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최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훈 씨, 어디야?” 최성훈은 핸드폰 너머로 그녀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쥐고 물었다. “수아야, 어디 있어? 내가 바로 그쪽으로 갈게!” 강수아가 울며 자신이 현재 위치를 전했다. “성훈 씨, 여기 너무 추워. 나 무서워. 비도 오는데 빨리 와. 알았지?” 최성훈은 바로 답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려.” 말을 마친 최성훈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층에서 뒤돌아본 소윤정은 황급히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쓴웃음이 떠 올랐다. ‘소윤정, 잘 봐. 이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의 차이야. 최성훈이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 잘 지내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아.’ 소윤정은 묵묵히 침실로 돌아와 캐리어를 꺼내 자신의 짐을 꾸렸다. 가을비가 내리고 한기가 몸에 스며들어 뼛속까지 에는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최씨 별장 3층에 있는 소윤정은 아직도 잠에 들지 않았다. 안방의 큰 침대는 세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크기였는데 평소 최성훈이 있으니 텅 빈 느낌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오늘 혼자만 침대에 있으니 마치 얼음과 같아서 뼈가 아플 정도로 추웠다. 비록 히터를 틀었지만 하체는 여전히 추웠다. 두 동강이라도 난 듯, 반은 따듯함에 반은 차가움에 싸여 있었다. 남편이 귀가를 기다리지 못한 소윤정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지만 편안히 잠들지는 못했다. 잠결에 그녀는 다시 5년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소윤정은 대학교 2학년 학생으로 긴 생머리에 청순하고 사랑스러우며 웃는 모습이 매우 사랑스럽기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5성급 호텔에서 웨이터로 근무했다. 그날 밤, 남자 친구 송이준이 찾아와 본인이 유학 하러 간다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었다. 소윤정은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송이준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돌아갔다. 그녀는 호텔 복도에 서서 떠나는 송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픈 마음을 홀로 삼켰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무서운 손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소윤정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옆방으로 끌려가 평생 지울 수 없는 악몽을 맞이했다. 그녀는 그렇게 낯선 사람에게 순정을 빼앗겼다. 깨어났을 때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는데 바닥은 어질러져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 일을 눈물과 함께 애써 삼켰다. 소윤정은 순진하게도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고 생각만 하지 않으면 일어난 적 없는 일이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두 달 후, 그녀는 걸핏하면 토했는데 처음에는 배탈이라도 난 줄 알았다. 나중에 병원으로 가 검진을 받고 나서야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끔찍한 악몽을 꿨는데 왜 이런 사실마저 감내하라고 하는 거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밤, 그녀는 절망적인 심경으로 바닷가 절벽 위에 서서 몸을 던져 뛰어내렸다. 그녀가 마침내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큰 손이 그녀를 바다 밑에서 건져 올렸다. 그 사람은 최성훈이었다. 최성훈은 당시 아이와 그녀에게 명분은 줄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면 바로 이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날부터 소윤정은 최성훈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의 아내라는 위치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최성훈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난날의 악몽은 미친 듯이 자라는 넝쿨처럼 소윤정의 마음을 휘감았고,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큰 손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어 숨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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