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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늘 냉정하고 표정 변화가 크게 없던 최성훈은 강수아가 억울한 모습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소윤정을 쏘아보던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버렸다. “소윤정, 이제 만족해?” 최성훈은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바람처럼 떠나버렸다. 그의 발걸음이 너무 빨랐다. 소윤정은 다급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녀는 드디어 현실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최성훈이 강수아를 사랑하는 만큼 소윤정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쓰러져가던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순간이 되었다. 소윤정의 마음도 함께 죽어버렸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던 탓인지 속은 허전했고 가슴은 아플 정도로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억눌린 듯 헤어 나올 수 없어서 뼈저리게 아팠다. 음식을 한입 가득 넣고 열심히 씹어도 가슴 속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여현아는 소윤정이 여전히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나쁜 년! 멀쩡하던 저녁 식사를 이런 분위기로 만들어 놓고 밥이 아직도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니? 너 돼지야?” 딸과 아들이 모두 소윤정 때문에 자리를 떠나게 되자 여현아는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소윤정은 입안에 들어있던 음식을 몇 번 더 씹었다. 그녀는 밀랍을 씹는 듯한 느낌에 도저히 삼키기 힘들었지만 꿀꺽 넘겨버렸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안의 음식을 삼킨 후 소윤정은 반 박자 느린 움직임으로 여현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돼지인가 봐요. 돼지 같은 자식을 둔 어머님과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비굴하게 비위를 맞추고 몸을 굽혀 애원해도 여현아와 최지민은 결코 그녀를 한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다. 이제 소윤정은 더 이상 그들 앞에 무작정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금이 간 항아리는 부서지도록 내버려둬야지. 여현아는 자신도 돼지라고 부르는 소윤정의 말에 분노하며 그릇을 들어 소윤정의 얼굴을 향해 던지려 했다. 하지만 최재용이 험악한 얼굴로 제지하며 그녀의 손에 들린 접시를 내리눌렀다. “왜 이러는 거야? 당신 꼴 좀 봐.” “윗사람이면 윗사람답게 행동해야지.” “따라 와!” 최재용은 여현아에게 접시를 날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여현아의 손목을 잡아끌어 강제로 위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넓은 식탁에는 소윤정만 남았다. 공기가 응축된 듯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숨이 가빠왔다. 도우미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혼자만의 식탁을 보며 소윤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녀는 차분하게 식사를 계속 이어갔다. 배가 불러야 슬퍼할 힘도 생기니 말이다. “소윤정, 대체 무슨 생각이야?” 황급히 자리를 떠났던 최성훈이 다시 돌아왔다. 남자의 짙은 색 와이셔츠 어깨는 수정 같은 빗방울로 얼룩져 있었고 이마에 있는 앞머리는 빗물에 젖어있었다. 그와 함께 몸에서 풍기는 적대적인 기운도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아수라처럼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소윤정을 사나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성훈은 강수아를 뒤따라갔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며 눈물을 머금고 사라졌다. 최성훈은 그녀를 찾으려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소윤정을 노려보았다. 느릿느릿 밥을 먹고 있는 소윤정을 본 최성훈은 화가 치밀어올라 거칠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소윤정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제로 그녀를 2층 침실로 끌고 올라갔다. 소윤정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푹신푹신한 침대 위로 세차게 밀쳐졌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마음도 따라 출렁였다. 최성훈의 커다란 몸이 내려앉으며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의 차가운 손끝은 이미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닿았고 그의 말투는 매우 음산했다. “너는 꼭 수아와 끝장을 보고 싶어?” 강수아는 그저 밥을 먹으러 왔을 뿐인데, 소윤정은 집을 꼭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결국 모든 것은 소윤정의 잘못이었다. 만약 소윤정이 예전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겠는가? 소윤정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의 손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그녀의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했다. 실망감에 가득 찬 여자의 눈동자에는 온통 공허함만 담겨있었다. 이제 와 보니... 한 사람을 싫어할 때면 그 사람의 숨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실망이 극에 달한 소윤정은 변명할 의욕마저 상실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체념한 듯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게 수아 씨를 위한 복수라면 어서 죽여요.” 최성훈이라는 남자는 보기에는 우아하고 젠틀해 보여도 실상은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때는 멀쩡했지만, 일단 건드리게 되면 가벼운 경우에는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심한 경우라면 집안이 망하고 가정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수아는 그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소윤정은 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최성훈이 어떻게 쉽게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까? 그리고 소윤정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성훈은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뭐 하러 발버둥을 쳐?’ ‘그냥 내버려둬.’ 최성훈은 강수아를 대신하여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지만 소윤정의 모든 의지를 상실한 표정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일어나, 소윤정!” 최성훈은 지금의 소윤정이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금이 간 항아리가 결국엔 깨져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소윤정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수아 씨의 복수를 위해 날 죽이고 싶지 않아요? 어서 죽이라니까요!” 이 순간 소윤정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깊은 호수처럼 죽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최성훈은 그녀의 작고 하얀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소윤정의 얼굴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체념을 눈치채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최성훈은 소윤정을 증오했고 그녀에 대한 혐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소윤정을 목 졸라 죽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소윤정이 ‘이혼’을 언급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특히 지금의 그녀는 최성훈의 마음속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얽히게 만들었다. 마치 잡초가 자라서 땅을 잠식하다가 순식간에 대지를 덮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최성훈은 소윤정의 목을 조른 손을 풀고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나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당장 일어나! 이런 꼴을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래!” 소윤정은 움직이기조차 싫은 듯 그저 침대에 누워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목은 길게 뺀 상태였다. “목 졸라 죽일 생각이 아닌가요? 내가 죽으면 수아 씨를 당신의 부인 자리에 앉힐 수 있을 테니.” 소윤정은 너무 지쳤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고 극심한 피곤이 몰려왔다. 소윤정은 정말 이렇게 그의 손에 죽고 싶었다. 그녀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테니.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초연한 그녀의 모습은 최성훈을 한없는 분노에 잠기게 했다. 최성훈은 빠른 보폭으로 다가와 그녀의 위에 올라타더니 자기 몸으로 소윤정을 내리눌렀다. 최성훈은 비록 말랐지만 1미터 90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진 남자였고 근육질의 몸매라 소윤정의 몸을 내리누르자 킹사이즈의 침대가 아래로 푹 꺼졌다. 그녀는 가슴이 커다란 돌덩이에 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윤정은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생존 본능으로 그녀는 손을 뻗어 몸 위에 올라탄 남자를 밀쳐냈다. “성훈 씨,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비굴하게 이혼을 구걸하는데, 더 이상 뭘 더 바라요?” “하준이 외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내가 떠난 뒤 수아 씨랑 결혼하고 그 여자를 집안에 들이면 다들 기뻐하지 않겠어요?” “왜 날 놔주지 않는 건데요?”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소윤정은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스스로를 최성훈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자아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만약 5년 전, 최성훈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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