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소윤정은 문득 여자가 모질지 않으면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말을 떠올렸다
소윤정이 최씨 모녀를 자기 가족처럼 대하고 마음과 정성을 쏟았는데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걸핏하면 빈정거리며 무시하고, 강수아를 집에 불러들여서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렇다면 소윤정도 더 이상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최지민이 ‘개 짖는 소리’라고 욕설을 퍼부으니 소윤정이 ‘똥 덩어리’라고 맞받아치는 것은 지극히 공평한 일이었다.
소윤정이 막 그 말을 뱉어냈을 때 옆에 서서 시중하던 도우미들은 순식간에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웃음 포인트가 낮았던 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웃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반응이 느린 사람 중 일부는 뒤늦게 알아채고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최지민은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도우미들의 억누르는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소윤정이 자기에게 한 욕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똥 덩어리에 비유하다니.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 최지민은 소윤정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설을 날렸다.
“소윤정, 이 나쁜 년. 감히 나한테 똥 덩어리라고 해? 죽여버릴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최지민은 여현아의 손을 뿌리친 후 쏜살같이 소윤정에게 달려가 손을 높이 치켜들고 때리려 했다.
하지만 소윤정은 이에 대비해 손을 들어 최지민의 손목을 꽉 잡았고 손바닥은 결국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지 못했다.
최지민은 오른손이 제지당해 움직이지 못하자 왼손을 들어 다시 소윤정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소윤정은 그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최지민의 손목을 잡은 채 살짝 힘주자, 최지민은 고통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더 이상 욕설을 멈추었다.
“소윤정, 너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해야 해? 독하기도 하지!”
소윤정은 손을 놓지 않고 입을 꾹 닫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망울에 날카로운 기운을 담은 채 최지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최씨 집안으로 시집을 온 지 5년, 최지민은 5년 내내 소윤정을 괴롭혔다.
그리고 오늘, 소윤정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최지민에게 자신은 아무에게나 괴롭힘을 당할 샌드백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여현아는 자기 딸이 뺨을 맞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소윤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소윤정, 뭐 하자는 거야? 지민이가 한두 마디 했다고 뭐가 어째? 네가 무슨 공주님이라도 되는 줄 알아? 한마디 뭐라고 하는 것도 안 돼?”
저 못돼먹은 소윤정은 집안 어르신을 등에 업은 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더 설쳐대고 있었다.
‘감히 지민이에게 손을 뻗다니, 위아래 없이 행동하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됐든 우선 그녀의 오만방자한 기세를 꺾어버려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어른인 시어머니를 대할 때 소윤정은 분쟁을 잠재우고 서로 편안히 지내는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은 최성훈의 어머니니까.
가문을 소중히 한다면 소윤정은 시어머니인 여현아를 존중하고 공경하며 친정엄마를 대하듯 효도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소윤정은 더 이상 자신을 굽혀 조용히 넘기려 하지 않았다.
소윤정은 매서운 눈매로 여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어디 한두 마디만 했나요? 먼저 욕을 한 건 아가씨이고 저는 맞받아친 것뿐이에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잖아요. 왜요? 당신들만 다른 사람을 욕할 수 있나요? 상대방은 대꾸도 못 해요?”
“어머님은 정말 하녀의 기질을 타고났네요. 아무나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소윤정은 기개를 활짝 펼쳤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비난하려는 의도를 보이면 즉시 되받아쳤다. 이 모녀의 체면은 반절도 살려주지 않았다.
소윤정의 말에 여현아는 말문이 막혔다.
최지민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숨을 죽인 채 소윤정을 바라보며 자신을 놓아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소윤정은 그녀의 애원하는 눈빛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리고 최태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님, 말씀하신 것처럼 아가씨가 철이 없네요. 제대로 교육받아야 할 거 같은데, 기도실에 가두는 건 적합하지 않은 것 같으니 차라리 성경을 베끼라고 하세요. 마침 어머님의 생일도 다가오니 어머님을 위한 기도도 하면서 말이에요.”
최지민을 기도실에 가두는 것은 하룻밤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릎을 꿇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딸을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여현아의 성격으로 보면 어떻게 최지민을 밤새도록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당연히 온갖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 딸을 나오게 하거나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몰래 전해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지민에게는 너무 가벼운 처사가 아닌가?
하지만 성경을 베껴 쓴다면 최지민은 혼자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아무리 많은 도움의 손길을 끌어들여도 필체가 다르니 한눈에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최태수는 그녀의 제안에 몹시 만족하며 동의한다는 눈길을 소윤정에게 보내고 최재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윤정이 말이 맞아. 지민이를 무작정 예뻐만 하니 얼마나 버릇없이 자랐는지 좀 봐.”
“지민이더러 성경을 베끼라고 해. 마음도 가라앉히고 부모님을 위한 기도도 하게 되니 얼마나 좋아?”
최재용은 이를 사소한 일로 여기고 아버지를 화나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단번에 동의했다.
“좋아요!”
여현아는 여전히 딸을 위해 애원하려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건...”
하지만 최태수는 단번에 결정을 내려버렸다.
“그런 거로 해, 지민이더러 성경을 베끼라고 해.”
“일주일 안에 다 베껴서 내게 가져오도록 해. 만약 속임수를 쓰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가문에서 정한 법대로 처벌할 테니. 그때 가서 원망하지 마.”
최지민은 변명할 겨를도 없이 최씨 집안 집사에게 끌려 나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최성훈은 시종일관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윤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그윽해졌다.
어쩐지 이 여자가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바탕 소동이 가라앉은 후, 상석에 다시 앉은 최태수는 밥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최태수는 하준의 손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마저들 먹어. 나는 하준이랑 잠깐 놀다 올 테니.”
노인과 아이는 사이좋게 산책하러 밖으로 나갔다.
최재용은 식당을 나서는 아버지를 공손한 눈으로 배웅한 후 시선을 돌려 꼼짝하지 않고 앉아 우아하게 식사하는 최성훈을 바라보았다.
“이 집안의 어수선한 정도가 아직도 마음에 차지 않아?”
최재용은 아들이 강수아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멀쩡한 저녁 식사가 엉망진창으로 변했고, 아버지가 노하여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는 사실에 그는 강수아라는 사람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성훈아, 일부일처제인 이 사회에서 가정의 화목은 최씨 기업의 주가에 도움 되는 일이란다.”
“만약 네가 감정적인 문제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안진 그룹을 네 손에 맡기기는 힘들어.”
아들이 저지른 일은 어떻게 인간 된 도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인가?
버젓이 내연녀를 최씨 집안 식사 자리에 등장시켜 아내와 같은 식탁에 앉히다니.
‘내 아들은 왜 이렇게 갈수록 어리석은 놈이 되는 걸까!’
강수아는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그를 대신해 변명했다.
“아버님, 그런 거 아니에요. 탓하시려거든 성훈 씨를 탓할 게 아니라 저를 탓하세요.”
“제가 성훈 씨를 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 굳이 집으로 찾아온 거예요. 잘못된 시간에 찾아온 줄도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저녁을 먹고 가라는 말에 승낙하고 보니 가족 식사 자리였던 거예요.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거예요.”
강수아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재용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혔다.
“아버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오늘은 정말 폐를 끼쳤어요. 앞으로는 절대 오지 않을게요.”
강수아는 그렇게 말하고 얼굴을 가린 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마음에 둔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가자, 최성훈은 황급히 일어나 그녀를 쫓아갔다.
최재용은 아들의 이런 행동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돌아선 아들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최성훈. 오늘 감히 이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간다면, 다시는 널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 알아!”
최성훈은 아버지의 경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수아의 발자취를 따라 나갔다.
소윤정은 자기 자리에 앉아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