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이진영은 애써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고 박민정과 기타 직원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기품 있고 아름다운 여인이... 같은 여자가 봐도 빠져드는 이 여인이... 이런 경국지색의 미녀가 대체 왜? 왜 이렇게 지저분하고 싼 티 나는 남자를 만나는 걸까?
“남자 친구면 또 어때서요? 우리 매장은 약쟁이와 도박꾼을 환영하지 않아요.”
박민정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도박꾼 주제에 어떻게 이런데 드나들 수 있나 했더니 돈 많은 여자를 제대로 물어 스폰받는 거였네. 저기요. 제가 호의로 말씀드리는 건데, 남자를 고를 때는 눈 똑바로 뜨고 골라야 하는 거예요. 얼굴만 보다간 된통 당할 수도 있어요.”
박민정은 앙칼진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정말 시끄럽군. 구찌 매장 점장 수준 왜 이래?”
모채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호의로 말해줬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점장이면 왜요? 뭐 어쩔 건데요? 그쪽이랑 뭔 상관이죠? 당신들한테 팔 생각 없어요. 꼬우시면 컴플레인 거시던가요!”
박민정은 백화점 지배인 남자 친구를 믿고 모채희까지 싸잡아 욕했다.
모채희는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뭐 어쩔 거냐고요? 어쩌긴요, 당신 밥그릇 빼앗아야죠.”
모채희는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장난해요? 어디 해 봐요. 어떻게 내 밥그릇 빼앗을지 궁금한데요?”
박민정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모채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그래도 이진영의 의사를 한 번 물었다.
“혼내줄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이진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모채희는 바로 비서에게 연락했다.
“나 지금 구정 백화점인데 당장 구찌 매장 사장한테 튀어오라고 해!”
“그쪽이 뭔데 우리 사장님을 오라 마라 해요? 웃겨, 진짜.”
박민정은 여전히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사장을 잘 알고 있다.
사장인 호기문은 만호 상회의 멤버로 나양시 여러 명품 대리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인맥과 실력이 어마어마하여 이 바닥에서는 거물로 불린다.
모채희는 비록 보통 사람처럼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전화 한 통으로 호기문을 불러오는 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직원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박민정 같은 용기가 없었다.
전화를 끊은 모채희는 더는 박민정과 입씨름을 하기 싫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진영만 아니라면 모채희의 신분과 지위로는 이런 잡다한 일을 직접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때 또 손님이 들어왔고 한 직원이 바로 마중을 나갔다.
“이진영?”
공교롭게도 또 아는 얼굴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바로 이진영의 전 약혼녀인 유정희였다.
이진영은 유정희를 힐끔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정희는 큰소리로 그를 비웃었다.
“너 마약하고 도박한다는 소식은 들었어. 지금쯤이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네? 진짜 목숨 하난 끈질긴 놈이야.”
“유정희 님도 아는 사람인가요?”
박민정이 물었다.
유정희는 구찌 매장 VIP 고객이라 박민정은 점장으로서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죽어서 재가 되어도 알지.”
유정희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 나한테 감정이 그렇게 깊었었나? 재가 되어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러자 이진영도 똑같이 그녀를 조롱했다.
“꿈도 야무져라, 난 네가 빨리 뒤지길 바라는 사람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산소만 낭비했지 살아서 뭐 해? 내가 너라면 진작 목매달고 뒤졌을 거야.”
유정희는 이진영을 잔뜩 비꼬았다.
“맞아요, 유정희 님.”
박민정은 마치 소울메이트를 만난 듯이 기뻐했다.
“여자 운이 지지리도 없네요.”
모채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오늘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인가 봐요.”
이진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여잔 누구예요? 또 동창인가요?”
모채희가 물었다.
“약혼녀요. 유씨 가문 아가씨, 유정희.”
이진영이 말했다.
“야, 이진영. 말 똑바로 해. 누가 네 약혼녀야!”
유정희는 바로 부정했다.
“나 이젠 너랑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꿈 깨! 넌 거울도 안 보고 다녀? 너한테 내가 가당키나 해? 그 혼약은 나한테 가장 큰 수치야!”
유정희의 말에 모채희는 바로 둘의 관계를 완전히 꿰뚫어 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야말로 진영 씨한테 가당치 않아 보이는데? 유씨 가문 아가씨라, 그게 대단한 거야? 별것도 아닌 주제에.”
모채희는 남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체면과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오늘 만난 두 여자 중 하나는 고등학교 때 그를 짝사랑했던 여자고 다른 하나는 그의 전 약혼녀였다.
하여 그녀는 이진영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주기로 다짐했다.
유정희는 아까부터 저도 몰래 자꾸만 모채희에게 시선이 갔는데 모채희의 기품과 외모에 그녀는 저도 몰래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는 모채희가 이진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매장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또 뭐야? 왜 끼어들고 난리야? 입 안 다물어?”
워낙 모채희에게 질투심을 느꼈던 유정희는 모채희가 이진영 편을 들어주자 불쾌함이 폭발해 유씨 가문 아가씨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자 박민정이 다급히 말했다.
“돈 좀 많은 여자 같은데 이진영 스폰서 같아요.”
“풉...”
유정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저 병신 스폰서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사실이에요. 저 여자가 이진영한테 옷 사준다고 여길 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호의로 속지 말라고 말했는데 어찌나 사납게 굴던지. 뭐라더라? 내 밥그릇을 빼앗겠다고 하면서 우리 사장님까지 불러온대요.”
박민정은 방금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유정희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유정희는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얼굴값을 못하네, 어쩜 저런 병신을 스폰하냐고. 이 매장 사장 누군 줄 알기나 해? 나양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야. 내가 전화해도 만나지 못한다고.”
유정희는 박민정과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모채희와 이진영을 비웃었다.
하지만 모채희는 화를 내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이진영에게 물었다.
“저 두 여자, 광대 같지 않아요?”
그러자 이진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네?”
모채희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광대 맞아요.”
이진영의 진지한 말에 모채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채희와 이진영 앞에서 두 여자는 확실히 광대였다.
“감히 날 놀려?”
유정희도 워낙 성격이 까칠하고 싸가지가 없어서 이런 모욕은 절대 참지 못했다.
“이 정도면 체면은 세워준 거야. 사실 당신은 광대보다도 못한 존재지.”
하지만 모채희도 만만한 성격이 아니다.
그녀도 날카로운 말로 상대를 공격했고 상대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