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이진영은 별로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깊게 털어놓기 싫었지만 모채희는 계속해서 의사를 밝혔다.
“이진영 씨 능력을 보면 진모현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겠지만 저도 기꺼이 힘을 보탤게요.”
“급하지 않아요. 천천히 놀아야 재밌는 법이니까요.”
이진영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모채희는 속으로 감탄했다.
진모현, 내가 외모로나 능력으로나 당신을 이길 수 없을 진 몰라도 이젠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당신은 이진영이라는 보석을 놓쳤고 난 그와 친해질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이 남자의 부모님이 부탁한 사람으로서 나중에 우리 회사를 압도했을지도 모르지.
지난 1년 동안 진모현의 명성은 점점 더 커졌고 모채희를 능가하는 듯한 기세를 보였다.
상류층에서는 모채희는 비록 아름답지만 진모현에 비해 성숙한 매력과 맛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채희는 탄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모현은 이진영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성안 그룹을 점점 더 크게 발전시켰기에 능력 면에서도 모채희보다 더 강하다고 평가했다.
나양시에서 가장 유명한 두 미녀 중 하나로서 모채희는 당연히 기분이 불쾌했고 언제부터인가 진모현과 은연중에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진영과의 관계를 이용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기분이 아주 흐뭇했다.
“이진영 씨, 집에 뭐가 부족한지 리스트를 적어주시면 제가 사 올게요. 그리고 혹시 도우미가 필요하시면 제가 직접 만족하실 만한 사람을 고용해 보내드릴게요.”
모채희는 이진영과의 관계를 반드시 유지하고 싶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도우미는 됐고요, 필요한 건 알아서 살 게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진영은 진모현 모녀에게 배신을 당한 적이 있어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항상 가지고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모채희는 상황 파악이 빠른 현명한 여자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이진영은 집안을 위아래로 둘러보았는데 확실히 모든 것이 새로 단장되어 있었고 오직 정원만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진영 씨, 시간도 늦었으니 같이 저녁이나 할까요?”
“모채희 씨와 저녁을 먹는 기회를 누가 마다하겠어요. 영광이죠.”
이진영은 비록 모채희에 대해서도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인상은 괜찮았다.
게다가 모채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흘러넘쳤다.
이진영은 평범한 인간이라 아름다운 여성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모채희는 차를 몰고 이진영과 함께 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식사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이진영이 물었다.
“저녁은 제일 위층에 예약했어요. 아직 시간도 좀 있으니 일단 쇼핑이나 하면서 옷 좀 고르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모채희 씨가 직접 옷을 골라주신다니 아주 기대되는걸요.”
이진영은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마저 너무 오래되어서 빛이 다 바랠 정도였다. 하여 그도 마침 새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저한테 맡기세요.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모채희는 이진영을 향해 윙크를 날리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모채희는 이진영과 함께 구찌 매장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죄송하지만 저 전화 한 통만 받을게요. 먼저 들어가서 구경하세요. 금방 올 게요.”
모채희가 말했다.
그러자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장으로 들어갔고 곧 직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젊은 여자는 이진영을 열정적으로 맞이했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실까요? 말씀해 주시면 제가 바로 찾아드리겠습니다.”
이진영은 비록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해당 직원은 그를 전혀 무시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했다.
“천천히 둘러볼게요.”
이진영이 말했다.
“이진영?”
이때 한 직원이 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민정?”
이진영도 한눈에 상대를 알아봤다. 그녀는 이진영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예전에 그를 짝사랑한 적이 있었고 외모도 꽤 봐줄 만했다.
“너 마약 하다가 들어간 거 아니었어? 벌써 나온 거야?”
박민정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진영은 박민정의 경멸을 느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랑 상관없잖아.”
“잘난 척은? 마약 중독자에 도박꾼 주제에, 아직도 자기가 이씨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박민정은 이진영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몇 명의 한가한 직원들이 다가와 박민정에게 상황을 물었고 박민정은 즉시 모두의 관심을 끌며 말했다.
“재 내 고등학교 동창인데 예전엔 재벌가 아들이라 아주 거만했어. 그런데 몇 년 전 부모님이 돌아갔고, 부모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니 결국 마약과 도박으로 집안을 다 말아먹었지.”
직원들은 흥미진진하게 박민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근데 넌 여기 왜 왔지? 여긴 구찌 매장이야. 네가 이걸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겠어? 설마 뭐 훔치러 온 건 아니야? 이 도박꾼아!”
박민정은 빈정거리며 이진영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자 이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나한테 차여서 지금 복수하는 거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네 꼴 좀 봐봐. 싸구려 옷을 입고 어떻게 감히 여길 들어올 생각을 해? 뻔뻔스러운 것, 당장 나가!”
박민정은 이진영을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언니, 그래도 고객님을 내쫓는 건 좀... 이러다 컴플레인이라도 걸면 어떡하려고요.”
처음에 이진영을 맞이했던 직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나 조용히 해. 내가 그깟 컴플레인을 무서워할 것 같아?”
박민정은 오만하게 말했다.
“맞아, 저런 도박꾼이 무슨 돈이 있다고 명품을 사겠어. 민정 언니 우리 매장 점장이야. 백화점 지배인 남친까지 둔 민정 언니가 뭐가 두렵다고!”
박민정의 말에 다른 직원들도 맞장구를 쳤다.
“들었지? 나 여기 점장이야. 내 남친 이 백화점 지배인이라고. 근데 넌 뭐야? 넌 루저고, 도박꾼이고 다들 꺼려하는 쓰레기일 뿐이야! 우리 가게 바닥 더럽히지 말고 당장 나가! 아니면 나 경비 부를 거야!”
박민정은 마침내 이진영 앞에서 한을 풀고 거절당했던 수치를 되갚아주었다.
매장 밖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모채희는 이 모든 상황을 주시하며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모채희는 재빨리 전화를 끊고 매장으로 들어갔다.
“고작 점장 주제에 고객을 모욕하고 쫓아내려 하다니요!”
모채희의 아우라에 사람들은 잠시 굳어져 버렸다.
“고객님, 오햅니다. 이쪽은 손님이 아니라 도둑이라서 몇 마디 한 것뿐입니다.”
박민정은 점장으로서 약간의 안목은 있었다.
모채희가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박민정은 그녀의 옷차림과 기품을 보고 바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쉽게 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내 남자 친구를 감히 도둑으로 몰아요? 그런데도 오해라고요?”
모채희는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더니 자연스럽게 이진영의 팔짱을 꼈고 깜짝 놀란 이진영은 잠시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