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그 말에 두 사람은 그제야 팔짱을 풀며 조금 떨어졌다.
“크흠,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저랑 해솔이 사이에 그간 불미스러운 일이 좀 있어서 원래는 결혼식을 취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힘든 시간 동안 설아가 제 곁을 지켜주었고 저에게 매우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용기를 내 결혼식을 취소하는 것이 아닌 신부만 바꿔 예정대로 결혼식을 올리려 합니다.”
“?”
권해솔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그의 말에 기가 막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얼른 사실을 바로 잡으려는데 강현수가 다시금 입을 놀렸다.
“저와 설아, 많이 응원해주세요. 그리고 잘 살 수 있게 예쁘게 지켜봐 주시고요.”
“세상에, 그러니까 권해솔이 바람을 피웠다는 거잖아?”
“어쩐지. 언니보다는 동생이랑 더 가까워 보이더라니...”
“그런데 강현수도 참 대인배야. 배신한 사람도 다 파티에 초대하고. 나 같으면 꼴도 보기 싫었을 텐데.”
“누가 아니래?”
권해솔은 사람들의 말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혼자 소리를 내 본다고 한들 그녀의 말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기에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홀로 분을 삭였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바로 강재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강재하가 등장하자 수군거리던 목소리를 죽이고 넋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삼촌, 마침 잘 오셨어요. 삼촌도 뭐라고 얘기 좀...”
강현수는 강재하를 보자마자 아군을 만난 것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강재하는 그런 조카를 무심하게 지나치더니 이내 권해솔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강현수에게 말했다.
“무슨 얘기? 사실은 잘못한 인간이 너라는 얘기?”
그 말에 사람들이 다시금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우려는데 갑자기 주위가 암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따뜻한 조명 하나가 강재하와 권해솔의 위로 떨어졌다.
“한 곡 추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권해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로 한발 다가갔다.
강재하는 한 손으로는 권해솔의 허리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권해솔은 전달되어 오는 체온이 따뜻해서인지 괜히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연미복을 입은 강재하와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권해솔은 가히 완벽한 한 쌍이라고 형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마치 이 파티장 전체가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세팅된 무대 같았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추는 것을 지켜보다 자기들도 추고 싶었는지 하나둘 짝을 지어 무대로 향했다. 그 덕에 파티장 분위기도 한결 좋아졌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연주가 거의 끝나갈 때쯤 권해솔은 조명이 점점 어두워짐에 따라 마주 잡고 있던 강재하의 손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싶어 어리둥절하던 그때 주위가 다시 밝아지고 권해솔은 그제야 강재하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남 일에 관심을 가지는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권해솔은 어쩐지 강재하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각, 강현수와 권설아는 춤을 추는데 끼지도 못하고 구석에 서서 이만 갈았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삼촌이랑 얘기 잘 끝났다며?”
권설아가 입을 삐죽이며 묻자 강현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날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아버지에게 욕설을 진탕 듣고 무릎을 꿇기만 했을 뿐 강재하와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강재하가 워낙 바쁜 몸인 탓에 만나지 못했고 말이다.
“삼촌이 겉으로는 저래도 속으로는 우리를 이해하고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권설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곡을 다 끝낸 후 사람들은 권해솔 쪽으로 몰려들어 그녀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었다.
이에 권해솔은 확실한 답을 주지 않고 그저 대충 얼버무리기만 했다. 어차피 며칠 뒤에 있을 결혼식에 참석해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권해솔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 쪽으로 갔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3층으로 향했다.
“뭔 계단이 이렇게도 많아!”
권해솔은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하이힐을 벗어 던지며 빨갛게 부어오른 발을 마사지했다.
“뭐 좀 도와드릴까요?”
그때 한 남성이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차려입은 걸 보니 파티장 스태프인 것 같았다.
권해솔은 돌려 말할 힘도 없어 아예 휴대폰을 보여주며 이곳이 어딘지 물었다.
“3층 회의실이군요. 계단을 마저 올라가셔서 쭉 걸어가다가 코너에서 왼쪽으로 도시면 [회의실]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나올 겁니다. 혹시 다리가 많이 불편하신 거면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권해솔은 빠르게 거절한 후 다시 위로 올라갔다.
스태프의 말대로 걸어가 보니 정말 [회의실]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있었다.
이런 곳은 원래 문을 잠가두는 법인데 예상외로 쉽게 열렸다.
“무슨 노트북이...”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수십 대의 노트북에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권해솔은 얼른 임유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지금부터 노트북 전원을 하나하나 다 켜 볼 테니까 어느 노트북인지 확인해줘.”
“알았어.”
권해솔은 노트북 전원을 하나하나 누르며 임유승 쪽의 반응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마지막 한 대만 남았다.
그런데 전원 버튼을 아무리 눌러봐도 노트북이 켜지질 않았다.
“뭐야. 배터리가 없는 건가?”
권해솔은 중얼거리며 충전기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심장이 철렁한 그녀는 회의실 책상 아래로 급히 몸을 숨겼다.
“왜? 무슨 일...”
권해솔은 임유승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얼른 전화를 꺼버렸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권해솔은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회의실로 들어온 사람이 강재하임을 확신했다. 재이와 너무도 비슷한 목소리였으니까.
켜져 있는 노트북을 발견한 강재하는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권해솔은 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숨을 꾹 참았다.
그런데 그때,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에서 갑자기 진동이 울려댔고 이에 깜짝 놀란 그녀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던지며 몸을 크게 떨었다.
움직임이 컸던 탓에 머리는 책상에 부딪혀버렸고 휴대폰은 어느새 소파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권해솔은 낭패라는 얼굴로 기어 나와 황급히 휴대폰을 주워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어... 안녕하세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권해솔이 뭐라 해명하려는데 강현수가 먼저 그녀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레스, 더러워졌는데.”
그 말에 권해솔은 당연히 그가 소파에 먼지가 묻을 것을 염려한다고 생각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책상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탓인지 일어나는 순간 머리가 어질하며 몸이 휘청거렸다.
“죄송해요. 소파는 제가 내일 새것으로 배상해드릴게요.”
권해솔은 지금처럼 창피한 순간은 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내 말은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강재하는 권해솔의 팔을 부축해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어차피 금방 집으로 돌아갈 거라.”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죠?”
권해솔은 그 말에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변명을 생각해냈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사람들 다 있는 자리에서 강현수가 아닌 제 편을 들어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스스로의 순발력에 감탄하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고비 하나를 넘기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했다.
반대로 강재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색하게 눈을 피하며 아까와는 달리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