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래도 감사해요. 덕분에 오해를 풀 수 있었어요.”
권해솔은 슬슬 마무리 인사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런데 그때 강재하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감사하다면서 그저 말로만 때우실 생각입니까?”
어딘가 불만이 어려있는 듯한 목소리에 권해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나중에 밥이라도 살까요? 감사함의 의미로?”
강재하의 목소리가 재이와 비슷해서였을까, 그녀는 문득 그와 함께 식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재하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
“친구 추가해요.”
“아... 네!”
권해솔은 빠르게 친구 추가를 한 다음 거의 도망 나오다시피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파티장에서도 나와 근처에 주차된 택시에 올라탔다.
“아가씨, 어디 아파요? 얼굴이 빨간데?”
기사의 말에 권해솔은 볼을 만지작거리다 그제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이고, 옷을 너무 적게 입었네. 다음에는 걸칠 거라도 입고 나와요. 감기 걸리겠어.”
“하하... 네.”
권해솔은 적당히 대꾸해주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볼 전체에 피어오른 열감 때문일까, 강재하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곧장 임유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메일 보낸 사람이 누군지는 못 알아냈어.”
임유승은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권해솔에게 무슨 일 생겼으면 그는 아마 정채영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타깃을 걸어뒀으니까. 노트북에 전원이 켜지는 순간 바로 카메라부터 해킹될 거야.”
“다행이네. 고생했어.”
“네가 제일 고생했지 뭐. 일찍 자.”
“응.”
권해솔은 전화를 끊은 후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낯선 이로부터 메시지 2개가 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내일 오전 11시.]
[서담 레스토랑에서 보죠.]
권해솔은 인터넷에 서담 레스토랑을 검색하고는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일 인당 40만 원은 넘는 비싼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레스토랑을 바꿀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예약했다.
그러고는 답장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오늘 파티에 참석했다가 억울한 일 당할 뻔했던 거 있지? 그런데 다행히 어떤 좋은 사람이 나타나 줘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어.]
[그런데 그 좋은 사람이랑 아주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거든? 하... 비싼 데서 밥을 사는 만큼 오늘 일은 다 잊어줬으면 좋겠다.]
다음날.
권해솔은 귀를 때리는 알람 소리에 여느 직장인이 다 그러하듯 빠르게 끄고는 다시 잠을 잤다.
그러고는 10분 간격으로 알람이 5번쯤 울렸을 때야 눈을 비비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떤 옷을 입어야 상대방의 동정심을 자극할 수 있을까? 너무 티 나는 거 말고.”
권해솔이 옷을 이것저것 몸에 대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정심을 자극할 생각이라면 권설아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걔 그런 거 잘하잖아.”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정채영의 웃음소리에 권해솔은 휴대폰을 한번 째려보더니 이내 괜히 전화를 걸었다며 다시 끊어버렸다.
하지만 정채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권설아의 주특기가 바로 가녀린 척, 연약한 척, 불쌍한 척이었으니까.
결국 권해솔은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가장 무난한 옷으로 골라 입었다. 괜히 의도가 보이는 옷을 입었다가 강재하가 무슨 낌새를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집에서 나온 후 그녀는 약속했던 11시에 딱 맞춰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강재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혹시 까먹은 건가?”
“권해솔 님 맞으신가요?”
“네.”
“이쪽으로 오시죠. 강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웨이터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가 그녀가 시간을 자꾸 확인하는 걸 보고서야 혹시 하는 마음에 말을 걸었다.
권해솔은 웨이터가 예약한 자리가 아닌 웬 룸 앞에 데려다주자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강 대표님께서 룸으로 예약을 주셨습니다.”
“아...”
권해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강재하는 권해솔이 들어오고부터 자리에 앉을 때까지 시선을 쭉 그녀의 얼굴에만 고정했다.
“왜 약 안 발랐습니까?”
권해솔은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그러자 강재하가 웨이터를 불러 바르는 약과 밴드를 가져오게 하고는 이내 직접 그녀의 앞머리를 넘겨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원래 이렇게 잘 챙겨주세요?”
권해솔은 미소를 지었다가 이마에서 전해지는 따끔한 통증에 금방 다시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아무리 속상해도 몸은 꼭 챙겨야 합니다.”
아무래도 강재하는 그녀가 강현수 때문에 자포자기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전혀 아니었지만.
권해솔이 이마에 난 상처를 가만히 내버려 뒀던 건 어차피 이 정도는 며칠 안 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제 일은 안 물어보네? 다행이다...’
안심이 돼서 그런지 권해솔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겼다.
“강 대표님은 왜 안 드세요?”
권해솔은 비싼 곳은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가끔은 이런 식으로 외식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배가 안 고파서.”
강재하는 그렇게 말하며 한 입도 안 댄 스테이크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어제는 3층까지 어쩌다 가게 된 겁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권해솔은 하마터면 입안에 있는 고기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크흠, 대표님이 거기 계시다고 해서 따라간 거예요...”
“이상하네요.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뭘 엄청 집중해서 찾는 것 같던데.”
“대, 대표님을 찾은 거죠! 그보다 대표님도 좀 드셔보세요. 여기요!”
권해솔은 대화를 끝내기 위해 포크로 고기를 집어 그의 입 바로 앞에 대령했다. 그러다 2초 정도 지난 뒤에야 그 포크가 자신이 썼던 포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권해솔은 포크를 내려놓고는 도망치듯 룸을 벗어났다. 그리고 강재하는 텅 비어버린 앞자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화장실.
권해솔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곧 터질 것 같았다. 화장이라도 했으면 덜 빨갰을 텐데 하필이면 생얼로 오는 바람에 물로 식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권해솔은 세수를 하고 얼굴이 하얗게 돌아온 뒤에야 다시 화장실을 나섰다.
그때 마침 화장실이 보이는 곳에 앉아있던 권설아는 친구들에게 반지를 자랑하다가 권해솔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권설아는 평소 비싼 음식점에는 눈길도 안 주는 권해솔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밟았다.
‘저 짠돌이가 이런 곳에 혼자 왔을 리는 없고... 혹시 남자랑 같이 왔나?’
룸으로 돌아온 권해솔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가 선물 상자를 꺼내든 강재하를 보고는 얼른 손을 저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선물을...”
그녀는 상자 속 물건을 확인한 후 저도 모르게 다시 입을 닫았다.
강재하가 보여준 건 그녀가 어제 착용했던 진주 목걸이였다.
“회의실 안에서 주웠는데. 이거, 권해솔 씨 목걸이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