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하!”
권해솔이 대놓고 비웃었다.
“신부를 바꾸면 체면 유지가 되시나 봐요?”
“권해솔!”
줄곧 입을 닫고 있던 권태산이 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애초에 네가 일을 키우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어! 강 대표가 기자들 쪽도 수습해주고 현수를 데리고 너한테 사과하러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대체 여기서 뭘 더 원해? 네 동생과 현수가 꼭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속이 시원하겠니? 회사 주가에 영향이 가야 속이 시원하겠어?!”
권해솔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권설아의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권태산의 눈에는 권설아와 강현수의 밀회를 사람들에게 까발린 권해솔이 더 죄인이고 더 못된 사람이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의 배신을 당했는데 제가 이 정도도 못 해요?”
권해솔은 꿇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저한테 설교할 시간이 있으면 아빠 둘째 딸 정신머리 교육이나 더 시키세요.”
“이게 진짜...!”
권태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권해솔은 권태산이 손을 올릴 거라는 걸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러기를 3초, 아무리 기다려봐도 뺨에서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눈을 천천히 떠보니 강재하가 앞을 막아선 채로 권태산의 손목을 부러트릴 정도로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권 대표님은 늘 이런 식으로 가정 교육 해오셨나 보죠? 권설아 씨가 그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그렇게 부끄러움이 없나 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 있었네요.”
강재하의 입에서 싸늘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권태산은 설마 강재하가 막아설 줄은 몰랐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권해솔 역시 권태산과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그와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가 놀란 건 바로 앞에 있는 강재하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비슷한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뒷모습까지 재이랑 닮았지? 이 사람은 대체...’
권해솔이 벙쪄 있던 그때 정신을 차린 권태산이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강 대표, 이번 일로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들 일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뒤탈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할 테니까.”
강재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어떻게 하시게요? 첫째 딸을 희생해서 일을 마무리하시게요? 그럴 생각이시면 저희로서는 이번 혼사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딸도 포기하시는 집안과는 사돈을 맺고 싶지 않아서요. 나중에 그 딸이 저희 가문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뭘 단단히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설령 결혼이 깨진다고 하더라도 체면이 깎이는 것도 손해를 입는 것도 다 권씨 가문일 겁니다. 원인 제공자가 권씨 가문에 있으니까요. 즉, 저희 가문은 파혼이 되든 말든 전혀 타격이 없다는 소리죠”
그 말에 권태산과 소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권설아는 다리가 다 후들거리는지 강현수의 품에 와락 안겼다.
소미란은 이대로라면 강씨 가문과의 혼사가 어그러질 것 같아 얼른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강 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해솔이도 우리 집 딸인데 우리가 왜 해솔이를 희생시키겠어요. 그저 기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의 책을 찾아보자는 거죠. 애들이 이렇게도 좋다는데 어쩌겠어요.”
권태산도 서둘러 말을 보탰다.
“강 대표, 솔이도 내 친딸인데 소중하기야 다 똑같지. 애 엄마가 일찍 죽고 내가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얼마나 신경을 써서 솔이를 키웠는데.”
권해솔은 자애로운 아버지인 척하는 권태산의 말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 전환을 기가 막히게 눈치챈 강현수가 권설아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삼촌, 이번 일은 내 마음이 변해서 벌어진 일이라 해솔이한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설아예요. 이제는 설아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내가 다 책임질게요. 남자로서 내가 다 책임지고 뭇매를 맞을게요! 절대 해솔이도 설아도 욕먹게 안 해요!”
얼핏 들으면 남자답고 멋진 말 같지만 강재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 책임감이 조금 더 일찍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은데.”
강현수는 그 말에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강재하는 다시 시선을 돌려 권해솔을 바라보았다.
“권해솔 씨는 이번 일이 어떻게 처리되기를 원하시죠?”
가족들을 바라보는 권해솔의 눈빛은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오늘에야 비로소 이 집안 사람들의 진정한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한결같게도 소미란 모녀의 편이었다.
“뭐든 상관없어요.”
권해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도 결혼을 원한다는데 축하해주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둘이서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은데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죠. 청첩장에 내 이름이 새겨있기는 하지만 본인이 창피하지 않다면야 뭐가 문제겠어요. 안 그러니, 설아야?”
권설아는 그 말에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내가 감수해야지. 오빠랑 결혼할 수 있는데 그깟 이름이 문제겠어?”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일부러 더 강현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약 올릴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돌아온 건 권해솔의 미소와 진심 어린 축복이었다.
“미리 결혼 축하해. 둘이 백년해로하길 바랄게.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제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절대 놓아주지 마. 알겠지? 참, 두 사람 결혼식에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해줄 테니까 기대해.”
권설아는 선물이라는 말에 갑자기 불안해졌다가 금방 강재하가 기자들 손에 있는 사진을 다 처리한 것을 떠올리고는 안심하며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
“응, 언니. 고마워!”
권해솔은 겁날 게 없다는 표정인 권설아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순진하긴.’
배신한 두 남녀를 잡는 일에 권해솔이 고작 기자들만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휴대폰 안에는 기자들이 찍은 것보다 수위가 센 사진과 영상들이 차고도 넘쳤다.
권해솔은 CCTV 영상이 공개되는 순간 강현수와 권설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으로도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한편 강현수는 권해솔의 말에 기분이 이상하고 또 불편했다. 심지어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해놓고 이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그녀가 어쩐지 야속하기도 했다.
강재하는 강현수의 표정 변화를 보더니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피해자인 권해솔 씨가 괜찮다고 하니 저도 이쯤 하죠.”
강재하의 말에 권태산은 그제야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강 대표, 기왕 이렇게 온 거 결혼식에 관해서 나랑 서재에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겠나?”
강재하가 직접 찾아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권태산은 이번 기회에 친분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강재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혼식은 전에 정한 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내가 앞에까지 같이...”
“아니요.”
강재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권해솔을 바라보았다.
“배웅은 권해솔 씨가 해줬으면 하는데.”
권해솔은 그 말에 2초 정도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권해솔과 강재하를 제외한 나머지는 낯선 조합에 무슨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다가도 이내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상류층 가문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있는 가문의 실세인 강재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