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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하지만 남자는 그 외침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관심조차 없는 건지 발걸음을 멈추는 법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권해솔이 허겁지겁 달려 쫓아왔을 때는 이미 문이 스르르 닫히는 중이었다. 아주 좁은 문틈으로 남자와 두 눈이 마주친 그녀는 심장이 찌릿하며 떨렸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사이에 어린 일말의 부드러움, 권해솔은 7년 전의 그 일이 오버랩되면서 다시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정말 저 사람이야?’ 권해솔은 그 생각에 얼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렇게 그녀는 하염없이 위로 올라가는 숫자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숫자가 28층에서 멈췄다. 28층은 방금 그녀가 내려온 곳, 즉, 강현수와 권설아가 묵고 있는 방의 층수였다. “솔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정채영이 물었다. “너 괜찮아? 얼굴색이 안 좋은데?” 권해솔은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으며 물었다. “채영아, 너 방금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남자 봤어?” 정채영은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봤지. 강현수네 삼촌이잖아. 그래서 나도 급히 안으로 들어온 거고. 너 혼자서는 힘에 부칠까 봐. 그런데 왜? 강재하 대표랑 만났어? 너한테 뭐라고 했어?” 권해솔은 벙찐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방금 그 남자가 강재하라고?’ 강재하 대표는 가차 없는 수단과 단호한 결단력으로 위태롭던 강성 그룹을 단 몇 년 만에 다시 정상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비즈니스의 귀재였다. 권해솔은 강현수와 연애했던 7년 동안 몇 번이나 그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고 싶었지만 심각한 일 중독인 강재하는 늘 회사에 파묻혀 있지 않으면 해외로 나가 있어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강재하는 강현수의 삼촌이기는 하나 나이 차이는 고작 5살밖에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강현수에게 듣기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생김새가 상당히 비슷해 실은 형제가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설마 날 구해준 게 강현수가 아니라 강재하였던 건가...?’ 이런 의심이 한번 들기 시작하자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졌다. 7년 전 그날, 목숨을 내던져 구해준 사람이 정말 강현수가 아닌 강재하면 그녀의 지난 7년은 우습기 짝이 없는 쓰레기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채영과 함께 차 안으로 돌아온 권해솔은 곧바로 태블릿을 집어 들어 강성 그룹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강재하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들어간 거였는데 문자로 된 소개만 있을 뿐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식 사이트가 아닌 강재하가 그간 참석했던 파티 사진들을 미친 듯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드디어 검은 슈트를 입은 그의 전신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비록 해당 사진 역시 옆모습밖에 찍히지 않았지만 구린 화질도 뚫고 나오는 날렵한 턱선과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어딘가 나른한 듯한 눈매가 그날 빗속에서 봤던 얼굴과 거의 90% 일치했다. 권해솔은 움직이던 손을 우뚝 멈추고 이내 힘없이 아래로 내렸다. “채영아, 너는 운명을 믿어?” 정채영은 룸미러로 보이는 친구의 망연자실한 얼굴에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애꿎은 핸들만 쥐었다가 또 폈다. 권해솔은 지금 모든 게 다 혼란스럽고 또 어지러웠다. 7년이었다. 강현수를 목숨을 구해준 은인으로 착각해 먼저 다가가고 또 알아가고 기어코 사랑까지 한 시간이 장장 7년이었다. 세상에 이렇게도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권해솔은 시트에 등을 기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채영아, 나 바다 보고 싶어...” 정채영은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며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바람을 얼마간 맞고 나니 권해솔도 마음이 정리된 듯 다시 이성적으로 돌아왔다. 강현수와 권설아의 꼴을 보면 붙어먹은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멍청한 거였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필터를 강현수에게 멋대로 씌워 조금도 의심하려고 들지 않았으니까. 며칠 전에 누군가가 강현수와 권설아가 엉겨 붙어있는 사진이 가득 담긴 메일을 보내주지 않았으면 권해솔은 아마 결혼식 날까지 영영 모른 채로 살았을 것이다. 권해솔이 본가 별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늦었는데도 거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분위기는 얼음장보다 더 차갑고 또 무거웠다. 거실에는 총 다섯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권해솔의 아버지인 권태산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소파에 앉아있었고 권설아는 엄마인 소미란의 품에 안겨 눈물을 짜내고 있었으며 강현수는 그 옆에서 속상해 죽겠다는 얼굴로 권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강현수의 삼촌인 강재하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상석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절로 공손해져야 할 것 같은 아우라가 멋대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권해솔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강재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현수, 지금 당장 권해솔 씨한테 무릎 꿇고 사과해.” 권해솔은 무릎을 꿇으라는 말보다 강재하의 목소리에 더 깜짝 놀랐다. ‘재이’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재하 쪽이 조금 더 목소리가 가라앉고 위엄이 넘쳤지만. 강현수는 강재하가 무서워 덜덜거리며 무릎을 꿇으려다 여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아 움직임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다시금 강재하의 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못 꿇겠어?” 이에 강현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천천히 무릎을 구부렸다. 그런데 그때 권설아가 다가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지 마, 오빠! 내가 잘못한 거잖아. 다 내가 멋대로 오빠를 사랑해버려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러니까... 무릎을 꿇어도 내가 꿇어.” 권설아의 모습에 강현수는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보여 뭔가 결심한 듯 권설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네가 왜 꿇어! 너도 잘못한 거 없어!” “오빠... 흑...” 신파 드라마의 한 장면을 다 연출한 권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권해솔을 향해 외쳤다. “언니, 제발... 제발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줘! 나 정말 현수 오빠 사랑한단 말이야!” 권해솔은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토악질이 다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너희 둘 중에 누가 무릎을 꿇든 바뀌는 건 없어. 사랑? 멋대로 해. 나는 강현수 너랑 약속했던 결혼만 무르면 되니까.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파혼 요청할게.” 권해솔은 강현수와 함께했던 7년을 원래부터 없었던 시간으로 치기로 했다. 두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결혼을 감행하는 선택도 있었지만 더러운 물에 있어봤자 똑같이 더러운 게 옮을 뿐이기에 과감히 포기했다. 그런데 그때 소미란이 앞으로 나서더니 파혼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파혼이라니! 이미 청첩장도 다 돌린 상태고 무엇보다 결혼식이 바로 코앞인데 갑자기 파혼 얘기가 나오면 두 가문의 체면이 뭐가 돼?” 권해솔은 그녀의 입에서 체면 소리가 나오자 기가 막혀 웃음이 다 나왔다. 그렇게도 체면을 중요시하는 인간이 자기 딸이 남의 남자를 꼬드겨 침대 위로 올라간 건 또 괜찮나 보다. “그럼 이렇게 된 마당에 뭘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권해솔의 말에 소미란이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신부를 바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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