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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오빠, 이제 결혼식까지 얼마 안 남았어. 오빠가 언니랑 결혼해버리면 나는 어떡해...?” “결혼식에서 내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는 건 권해솔이 아닌 권설아일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그렇게 만들어 놓을 거야. 뭣하면 결혼식 당일에 권해솔을 어딘가에 납치해서 끝날 때까지 가둬놓으라고 하지 뭐. 아무리 아버지가 해솔이를 좋아해도 결혼식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좋아했던 마음도 싹 가실 거고 그렇게 되면 우리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오빠 믿지?” CCTV 화면 안에는 홀딱 벗은 채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두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서로의 숨결을 들이마시며 낯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개자식들이!” 권해솔의 절친한 친구인 정채영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노했다. “솔아, 지금 당장 쳐들어갈까? 쳐들어가서 이 파렴치한 것들을 그대로 호텔 입구 앞에 던져 놓을까?!” 정채영은 지금 당장이라도 차 문을 열고 호텔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그러자 그때 줄곧 입을 닫고 있던 권해솔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갈 거야.” 권해솔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긴 목숨을 내던져 자신을 구해준 남자가 자신의 배다른 동생과 함께 침대 위에서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상냥한 말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채영아, 내가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기자들 풀어.” 권해솔은 자기 두 손으로 직접 쓰레기 남녀의 헛된 꿈을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정채영은 단호한 친구의 태도에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걱정하지 마.” 차 문이 열리고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권해솔이 차에서 내렸다. 권해솔은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 열댓 명을 거느린 채 당당하게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쾅! 방문은 경호원의 발차기 한방에 속절없이 열려버렸다. 방안에는 속옷을 포함한 옷가지들과 분위기를 돋우는 장미꽃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서로 얼마나 오래 엉겨 붙어있었던 건지 공기 중에도 사랑의 기운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했다. 침대 위에서 밀회를 즐기던 강현수는 갑작스러운 문소리에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옆에 있는 여자의 몸을 이불로 감싸주었다. 자기도 다 벗은 상태면서 여자부터 챙기는 것이 퍽 사랑꾼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소, 솔아, 네가 왜 여기 있어?” 권해솔은 그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끝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강현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저도 모르게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권해솔은 시선을 옮겨 강현수의 뒤로 숨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앵두 같은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뱉어냈다. “결혼식을 앞둔 내 약혼자가 내 동생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안 와?” 권설아는 다 알고 온 듯한 권해솔의 말에 숨는 것을 그만두고 강현수의 어깨에 찰싹 기댄 채 얼굴을 반쯤 드러냈다. 흰 피부에 핑크색으로 예쁘게 물든 볼, 거기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는 눈망울까지, 이제 막 청춘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여주인공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언니, 속여서 미안해... 하지만 현수 오빠랑 나,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언니가 양보해줘!” “사랑? 양보?” 연애하던 7년간 늘 다정하고 배려해주는 모습만 보여주던 강현수에게 대체 언제부터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랑이 생긴 건지 권해솔은 이 상황이 웃기지도 않았다. “권설아,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양보라면 이제껏 진창 해주지 않았어? 아니지. 양보가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뺏었지. 내 옷, 내 액세서리, 내 가방, 그 어느 하나 네가 탐내지 않은 게 없었잖아. 그런데 물건은 그렇다 쳐도 설마 남자까지 뺏어갈 줄은 몰랐는데 너는 정말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구나? 사람이 돼서 어떻게 이러지?” 권해솔의 비아냥거림에 발끈한 건 권설아가 아닌 강현수였다. “설아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다른 데로 눈을 돌린 건 전부 네 탓이니까. 해솔아, 우리가 연애한 지도 햇수로 벌써 7년째야. 그 7년 동안 스킨십 좀 하려고 하면 피하는데 내가 대체 언제까지...” “하, 그러니까 내가 스킨십을 허락 안 해줘서 내 동생을 찾았다는 거네?” 권해솔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실망이라는 감정이 물밀 듯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또한 이렇게도 성욕에 미친 사람을 사랑했던 스스로가 한심스럽고 추하게 느껴졌다. 권설아는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좋게 얘기할 생각도 없는지 권해솔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언니, 오빠는 이제 언니 안 좋아해. 그러니까 그만 질척거리고 이제 그만 놓아줘. 언니가 왜 버림받은 건지 알아? 목석처럼 딱딱하고 같이 있어도 재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나만 예뻐하잖아. 현수 오빠한테는 언니 같은 사람이 아닌 진짜 사랑을 받고 자란 나 같은 사람이 더 잘 어울려!” 권해솔의 친어머니는 그녀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기에 권설아가 말한 엄마는 새엄마였다. 그녀의 아빠라는 사람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한 후 전처 딸인 권해솔에게는 아주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고 아버지로서의 애정과 사랑을 전부 둘째인 권설아에게만 쏟아부었다. 권해솔이 밖에서는 권씨 가문의 사랑받는 첫째 딸로 소문나 있을지 몰라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우미보다도 못한 존재, 그게 바로 그녀의 위치였다. 권설아가 권해솔을 만만하게 보고 약혼자를 빼앗은 것도, 남의 남자를 빼앗아놓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도 다 집안의 서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서였다. 대놓고 강현수를 빼앗지 않았던 건 강현수의 아버지가 권해솔을 며느릿감으로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게 당당하면 어디 기자들 앞에서도 똑같이 한번 지껄여봐.” 권해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 무리가 벌떼처럼 안으로 들어왔다. 조용했던 공간이 단숨에 카메라 셔터 소리와 기자들 말소리로 가득해졌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강현수는 설마 권해솔이 기자를 데리고 왔을 줄은 몰랐다. 그는 권설아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권해솔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네가 먼저 날 배신한 거라고. 결혼식을 앞두고 내 동생이랑 침대에서 뒹구는 인간한테 내가 이 정도도 못 할 줄 알았어?” 권해솔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녀의 상처받은 얼굴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강현수, 너 같은 인간을 만나 사랑했던 내 지난 7년을 후회해! 나는 이 결혼 못 해. 아니, 안 해!” 권해솔은 말을 마친 후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해솔...” 강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잡으려다가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마터면 벌거벗은 모습을 그대로 기자들에게 보여줄 뻔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카메라를 그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댔다. 권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결혼 소식은 모두가 알고 있는 소식으로 이미 청첩장까지 다 돌려진 상태였다. 그런데 식을 올리기도 전에 이런 촌극이 벌어졌고 권해솔은 파혼하겠다며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얘기했다. 이 사실이 알려졌다가는 강씨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기에 강현수는 지금 꽤 골치가 아팠다. 한편 호텔 로비로 내려온 권해솔은 들어갈 때와 똑같이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멀쩡한 척을 해봐도 새어 나오는 고통은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말이 아니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7년이라는 시간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권해솔의 바로 옆으로 모델 같은 기럭지를 소유한 한 남자가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은은한 향수 냄새에 미약하게 섞여 있는 담배 향기, 그리고 금욕적인 분위기까지, 권해솔은 어딘가 모를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홱 하고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들어온 건 남자의 옆모습과 날렵한 턱선이었다. 그 순간, 권해솔의 머릿속은 마치 무슨 스위치라도 눌린 것처럼 멋대로 7년 전의 한 장면을 재생했다. 비가 정신없이 내리던 그 날, 권해솔이 물에 빠진 채로 허우적대다 이윽고 힘까지 다 써버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던 그때 누군가의 팔이 그녀를 강하게 이끌어 단숨에 물속에서 끄집어냈다. 권해솔은 당시, 의식이 얼마 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구해준 남자가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과 빗물이 그 남자의 머리에서부터 턱으로 흘러내려 남자의 얼굴을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은 확실하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비록 흐릿하게 본 얼굴이기는 했지만 대학교에서 강현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강현수라고. 그래서 그녀는 부끄러움도 없이 먼저 다가가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소원대로 그와 사귀게 되었고 핑크빛이었던 시간을 함께하며 이윽고 그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강현수와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이 난데없이 호텔 로비 한가운데서, 그것도 모르는 남자에게서 다시금 느껴졌다. 심지어 그때보다 더 강렬한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권해솔은 이 감정이 뭔지 제대로 정리해보지도 않고 냅다 낯선 남자의 뒤를 쫓아갔다.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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