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어머? 저기 저 사람, 신부 아니에요? 왜 신부 대기실에 안 있고 저기에 저러고 있는 거죠?”
“몰랐어요? 신부 바뀌었잖아요. 권해솔에서 권설아로.”
“권설아면... 권해솔 씨 동생 아니에요?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신부가 왜 언니에서 동생으로 바뀌어요?”
아직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권해솔은 그들의 말이 다 들렸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권해솔 씨 맞으시죠? 강 대표님께서 잠깐 보자고 하십니다.”
그때 식장 직원 한 명이 다가와 권해솔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권해솔은 갈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가보기로 했다.
직원은 그녀를 불도 켜져 있지 않은 어느 어두운 대기실로 안내해주더니 그녀가 뭐라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사라져버렸다.
“강 대표님?”
권해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강재하를 찾았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강재하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야?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거야?’
“강재하 대표님?”
권해솔은 어두컴컴한 공간을 향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답변도 들려오지 않았고 강재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돌아가려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한걸음 뒤로 내디딘 순간 물컹한 뭔가를 밟은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등 뒤에 있는 누군가와 몸이 부딪쳐버렸다.
“아!”
권설아는 설마 하이힐에 밟힐 줄은 몰랐는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권해솔은 난데없는 권설아의 등장에 눈살을 한번 찌푸리더니 이내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발걸음을 돌렸다.
“거기 서!”
권설아가 아픔을 참으며 그녀를 불러세웠다.
“동생이 결혼하는데 언니가 돼서 축하 한마디 정도는 건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권해솔은 그 말에 기가 막혔다.
“너는 상식적으로 네 자리를 뺏고 결혼한 동생한테 축하의 말을 하고 싶겠니? 얼굴이 두꺼운 것도 정도껏 이어야지.”
“언니 얼굴만 하겠어? 욕심도 많지. 어떻게 강재하 대표를 꼬실 생각을 했대?”
“너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 언니가 세게 한번 두드려줘?”
권해솔은 강현수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꺼낸 이유가 권설아 때문이라는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강 대표랑 둘이 밥을 먹은 것도 맞고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것도 맞잖아. 어디서 오리발이야?”
‘레스토랑에서 나랑 강 대표랑 둘이 있는 걸 봤구나?’
“미안한데 나는 너랑 달라서 식사 한번 했다고 남자랑 썸을 타지는 않아.”
권해솔은 자리를 벗어나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금 권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강 대표를 꼬셨다고 한들 그게 뭐가 문젠데? 내가 남자친구가 있기를 해 신랑이 있기를 해. 나랑 강 대표가 정말 만난다고 해도 윤리적으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어. 남의 남자랑 붙어먹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내 걱정할 시간 있으면 네 결혼식 걱정이나 해.”
권해솔은 잔뜩 쏘아붙인 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어두운 공간에 홀로 남겨진 권설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멀어지는 권해솔의 뒷모습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권해솔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콧방귀를 뀌었다.
잠시 후, 웅장한 노랫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먼저 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를 쫙 편 채 사람에게 손까지 흔드는 것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신랑 입장을 마친 후 곧바로 신부 입장이 이어졌다. 페이스 베일을 쓴 채로 모습을 드러낸 권설아는 단아한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일반 부케가 아닌 금으로 된 부케가 들려있었다.
권해솔은 그걸 보며 당시 강현수와 금으로 된 부케를 만드는 것으로 한차례 논쟁을 펼쳤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그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반대했고 강현수는 고작 금덩이 가지고 쪼잔하게 굴지 말라며 자신은 꼭 금으로 된 부케를 만들고야 말겠다고 했다.
‘결국에는 원하는 대로 만들었네.’
결혼식은 언뜻 큰 문제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회자의 축하 메시지가 끝이 난 후 권설아가 갑자기 쓰고 있던 페이스 베일을 벗어 던졌다.
“왜 신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저희 언니가 아닌 동생인 저인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누군가는 제가 언니 자리를 탐낸 거라고 하며 손가락질을 하겠죠.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방식이 언니한테는 다소 잔인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더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기에 여러분께 모든 걸 다 공개하려고 합니다.”
하객석에 있던 권해솔과 강재하는 동시에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얼굴로 똑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치지직 소리와 함께 식장 스피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현수 오빠가 불쌍하지도 않아? 어떻게 그렇게 착한 오빠를 버리고 강 대표님한테 눈길을 돌릴 수가 있어...?”
“내가 유부녀도 아니고 누굴 좋아하든 그건 내 자유지. 나는 이제 강현수가 질렸어. 그러니까 가지려면 너나 가져!”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지 인공지능으로 만든 대화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권해솔은 권설아가 이런 더러운 수까지 쓸 줄은 몰랐는지 어느새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언니,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아니면 현수 오빠만 욕을 먹게 되잖아. 욕을 먹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나는 언니랑 달리 현수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못된 짓만 일삼는 언니보다 오빠가 훨씬 더 좋아!”
권설아는 말을 마치고는 사람들을 완전히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눈물을 훔쳤다. 정말 불쌍한 척 하는 데는 타고난 사람이었다.
강재하는 음산한 얼굴로 통제실에 들어가더니 곧바로 권해솔의 위로 떨어진 조명을 치워버렸다.
“권해솔 씨,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동생이랑 현수 씨한테 진심 어린 사과라도 하라고요! 당신 때문에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안 보여요?”
“이렇게도 표독스러우니까 권 대표도 둘째 딸만 예뻐하지. 나 같아도 첫째 딸은 없는 셈 치고 싶겠네!”
“아니, 마음이 떠났으면 그냥 파혼하면 될 것을 동생한테 떠넘기는 건 대체 무슨 경우예요? 강현수 씨가 뭐 물건입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권해솔을 비난하고 질책했다.
권해솔은 이런 상황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권설아가 작정하고 주도할 때면 항상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권설아의 등 뒤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가 켜지더니 곧바로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오빠, 이제 결혼식까지 얼마 안 남았어. 오빠가 언니랑 결혼해버리면 나는 어떡해...?”
“결혼식에서 내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는 건 권해솔이 아닌 권설아일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그렇게 만들어 놓을 거야. 뭣하면 결혼식 당일에 권해솔을 어딘가에 납치해서 끝날 때까지 가둬놓으라고 하지 뭐. 아무리 아버지가 해솔이를 좋아해도 결혼식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좋아했던 마음도 싹 가실 거고 그렇게 되면 우리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오빠 믿지?”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대화, 그리고 대화 끝에 들리는 거친 숨소리와 낯뜨거운 신음까지, 그날의 광경이 또 한 번 권해솔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고얀!”
강석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에 든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그런데 너무 많이 흥분했던 탓인지 갑자기 뒷목을 잡으며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당장 어르신을 병원으로 모셔!”
강현수는 영상을 끄기 위해 얼른 통제실로 들어가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종료 버튼을 눌러봐도 영상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볼륨만 더 키워졌다.
사람들은 권설아의 뒤에서 재생되는 낯뜨거운 화면에 크게 술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 갑자기 180도 달라졌으니까.
몇 번이나 반복됐던 영상은 강현수가 코드를 전부 다 뽑아버린 뒤에야 간신히 멈췄다.
권설아는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 머리가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보셨던 영상은 합성입니다. 권해솔이 설아와 나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럴싸하게 만든 영상이라고요! 권해솔, 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니? 네 착한 동생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꼴이 보고 싶기라도 했던 거야?!”
강현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권해솔을 걸고넘어졌다.
멍한 얼굴로 있던 권설아는 강현수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씩씩거리며 권해솔이 있는 하객석 쪽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된 거 그녀도 이판사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