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유하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유도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봤는데 하마터면 방에 갇혀 마지막 기말고사를 놓칠 뻔했다. 제발 학교에 나가게 해달라고 비는 유하연을 보며 유도경이 뱉은 말이 있었다.
그 말을 기억해 낸 유하연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유도경에게로 다가가 차가운 입술을 유도경의 입술에 갖다 댔더니 바로 뗐다. 유도경의 키스와는 비길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유도경도 더는 유하연을 괴롭히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유하연의 심장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유하연이 병원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또 연차를 낼 핑계를 생각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병원에 도착한 유하연이 강아람에게 전화했지만 강아람은 환자가 와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사무실로 오라고 말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아 기다리는 데만 한참 걸릴 것 같아 유하연은 차라리 계단을 선택했다. 하지만 삼 층으로 올라가는 코너를 도는데 마침 유채린과 마주치고 말았다. 유채린도 유하연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3층은 산부인과였다. 뭔가 알아챈 유하연이 유채린의 손에 들린 임신 결과지를 확인했고 유채린도 임신했음을 알아챘다.
유하연은 목이 꽉 막혀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말하라니까. 여긴 왜 왔냐고.”
유채린이 달려들어 유하연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고기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윤재 씨가 있는 곳은 어디든 따라다니는 거지? 염치라는 게 있어?”
유하연이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고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입고 있던 셔츠가 갈기갈기 찢어졌고 미처 가시지 않은 키스 자국이 그대로 드러났다. 유채린에게 이는 민감한 신경을 자극하는 트리거나 다름없었기에 유하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귀싸대기를 힘껏 내리쳤다.
“빌어먹을 년이.”
흥분한 유채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신분을 앗아간 걸로 부족해? 20년 넘게 아가씨로 불리면서 산 것도 모자라 내 약혼자까지 뺏으려고? 세상에 어떻게 너처럼 파렴치한 인간이 다 있지?”
작지 않은 소동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옷이 찢긴 유하연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했다.
어찌나 힘껏 내리쳤는지 고개가 돌아간 유하연은 귀가 윙 했고 얼굴이 반쪽이 얼얼했다. 유채린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산부인과엔 왜 왔냐니까. 누구 핏줄이야.”
유채린이 다시 따귀를 날리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채린아.”
달려온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유채린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다가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유채린이 멈칫하더니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운 표정으로 품에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윤재 씨.”
유하연이 시선을 그쪽으로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심윤재가 거기 있었다. 심윤재의 등장에 유하연에게 관심을 잃은 유채린이 심윤재의 옷깃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윤재 씨. 우리 이제 약혼하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있지? 너무 얄밉지 않아?”
심윤재는 유채린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유채린의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사가 격렬한 운동은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다 아이가 위험해지면 어떡해.”
유채린도 그제야 자기가 엄마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다시 검사해 볼까?”
빌어먹을 유하연 때문에 아이를 잃는다면 그것보다 더 한심한 일이 없을 것이다. 심윤재가 가볍게 대답하더니 유채린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에 구경꾼들도 하나, 둘 흩어졌고 그 자리엔 유하연만 남았다.
심윤재가 그녀에게 던진 눈빛이 떠올라 목구멍이 꽉 막힌 유하연은 눈을 질끈 감고 애써 잊어버리려 했다. 유채린이 돌아온 뒤로 심윤재와 더는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하연도 더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려고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가려는데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유도경이 언제 왔는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유하연은 온몸이 저릿해 났다. 먼저 다가온 유도경이 오만한 표정으로 유하연을 내려다봤다.
“병원에는 어쩐 일이야?”
유도경은 늘 이런 식으로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으면서 바로 묻지 않았다. 지금도 사실 산부인과에 온 원인이 궁금하면서 병원에 온 이유를 묻고 있었다.
유하연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약 가지러 왔다가 지나치는 길이었어요.”
“지나치는 길이다?”
유도경이 이 말을 곱씹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야?”
유하연은 손에 땀이 차오르고 어깨가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어제 보고서 봤잖아요. 의사가 일정 기간은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어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강아람이 유하연의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오다 유도경과 눈이 마주치고는 걸음을 뚝 멈췄다.
“유 대표님?”
강아람이 코끝을 만지더니 유하연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하연이 데리고 약 가지러 가도 될까요? 몸이 안 좋은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같이 가시려고요?”
유도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유하연에게 말했다.
“밖에서 기다릴게.”
유도경이 멀어지고 나서야 강아람이 이렇게 말했다.
“와, 들키는 줄 알고 식겁했다.”
오늘 수술하긴 글렀다는 생각에 유하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유하연의 손에 약을 들려준 강아람이 내내 잔소리했다.
“처음엔 아이를 남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임신할 확률이 워낙 적으니까. 하지만 지금 봐서는 그냥 지우는 게 나을 것 같아. 유씨 가문에 어디 정상이 있니?”
“나도 제발 지웠으면 좋겠다.”
유하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도경이 한시도 놓치지 않고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기까지 하면 수술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약을 들고 병원에서 나오는데 유도경의 차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차에 올라서 보니 운전기사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유도경밖에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자료를 확인하는 유도경의 눈빛은 물결 하나 없이 잔잔했다.
유하연은 전에 유도경을 오빠로만 생각했다. 유도경은 오빠로서 합격이었고 유하연이 무리한 소원을 들어도 부드럽게 포용해 줄 줄 알았다. 어릴 적에 유동민이 외국에서 경매로 얻은 꽃병을 깨트리는 바람에 유동민이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유도경이 대신 나서준 덕분에 유하연은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유도경은 호되게 맞고 말았다.
3년 후 그런 일이 뒤로 유하연의 마음속 유도경의 이미지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로 유하연은 점점 유도경의 생각을 읽어내기 힘들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서 한 말을 유도경이 믿었는지는 둘째치고 지금 기분이 어떤지도 알아내기 힘들었다.
유하연이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유도경이 차갑게 물었다.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