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유하연은 복도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임신으로 확인됨.]
몇글자 안 되는 말에 유하연의 마음은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아이를 지워버리려고 결심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유도경을 떠나기 위해 몇 년간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돈을 조금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교환 학생으로 외국에 나가 공부할 기회가 있다고 연락해 왔길래 이미 신청해 둔 상태였다.
만약 일이 순조롭게 풀려 외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 유도경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건 이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생각해 둔 것이었다.
“하연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 강아람이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강아람이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왔고 유하연의 표정을 보자마자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바로 알아챘다.
“정말 지우려고?”
“응.”
유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빠른 수술로 알아봐 줘.”
강아람은 사실 유하연을 설득해 아이를 남길 생각이었다. 유하연의 체질에 임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중절 수술을 받으면 자궁에 더 큰 자극을 주어 평생 임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의사인 강아람이 모를 리가 없었지만 창백해진 유하연의 얼굴을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유하연의 손을 다독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지우는 것도 좋지. 유도경 핏줄인데 사이코패스일까 봐 두렵긴 하다.”
유하연이 한마디 덧붙였다.
“부탁할 게 하나 더 있어.”
“가짜 보고서가 필요해.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보고서 말이야.”
강아람이 흔쾌히 수락했다.
“걱정하지 마. 이따 돌아가면 바로 만들어줄게. 일단 수술하려면 검사가 필요하니까 내일 다시 병원으로 나와. 빠르면 이번 주에 수술하게 해줄게.”
강아람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예상대로 유도경이었다.
“여보세요?”
유도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실에 들러서 계약서 가지고 휘성 호텔로 와.”
유하연은 졸업 후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밖에서 일할 바엔 차라리 가족 회사인 유안 그룹에서 일하는 게 낫다는 김희영의 말에 유하연은 유도경의 비서가 되고 말았다. 다만 유채린이 돌아오면서 유하연의 자리도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한 유하연이 문을 여는데 강력한 알코올 냄새와 담배 냄새가 확 풍겼다. 원래도 속이 좋지 않은 유하연이 불편함을 꾹꾹 눌러 담으며 서류를 건네줬다.
상석에 앉아 있던 유도경은 달려온 유하연을 보며 눈꺼풀을 살짝 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유하연이 매뉴얼대로 대답했다.
“길이 막혀서요.”
서류를 가져다줬지만 유도경이 물러가란 말도, 앉으라는 말도 없자 유하연이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옆에 서 있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능구렁이인지라 유도경이 알게 모르게 유하연을 무시한다는 걸 바로 보아냈다. 게다가 유씨 가문에서 진짜 아가씨를 찾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파티까지 열어 웰컴식을 한 덕분에 유하연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하연 씨, 오랜만이에요. 나 기억해요?”
술잔을 든 남자가 불순한 의도로 바짝 몸을 붙였다.
“저번엔 유씨 가문에서 봤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뭐 그래도 우리가 친구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자, 한잔해요.”
그러더니 술이 가득 담긴 잔을 유하연에게 들이밀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유하연이 유도경을 바라봤지만 유도경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술을 권했으면 마셔야지.”
이 말은 유하연이 어떤 지위인지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유도경이 이런 말을 던진 이상 유하연을 챙길 사람은 없었다.
술을 들고 온 남자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술을 유하연의 입에 갖다 대다시피 들이밀었다.
“봐요. 오빠도 괜찮다잖아요. 왜요? 취할까 봐 그래요?”
남자가 헤벌쭉 웃으며 유하연의 손을 만졌다.
“뭐가 무서워요. 취하면 올라가서 방 하나 예약하면 되는데... 걱정하지 마요. 오빠가 나 몰라라 해도 내가 잘 챙겨줄게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남자와 손이 닿은 순간 유하연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죄송해요. 제가 술을 잘 못해서...”
“못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두 병만 마시면 못 마시던 것도 잘 마시게 되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남자가 막무가내로 술을 부으려 하자 유하연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다 떨리는 손으로 유도경의 팔을 잡았다. 유도경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됐어.”
유도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못 마시면 됐다고.”
유하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지만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호텔에서 나오는데 유도경의 차가 길가에 멈춰있는 게 보였다.
운전기사는 차를 대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른 유도경은 유하연이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자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타.”
유도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태워줄까?”
유하연이 차에 오르자마자 유도경이 손목을 으스러지게 잡더니 뒷좌석에 눕히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하얀 귓불을 깨물었다.
“안돼.”
유하연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유도경도 오늘 적게 마신 건 아니었기에 숨을 쉴 때마다 강력한 위스키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말짱한 정신에도 유하연의 말을 들을 리 없는 유도경은 유하연이 소리를 지른다 해서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유하연의 머릿속에는 온통 뱃속에 들어있는 시한폭탄이었기에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데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오늘 받았던 결과지가 흘러나왔다. 유하연이 얼른 손을 뻗어 주우려는데 유도경이 한발 빨랐다. 이에 기회를 잡은 유하연이 얼른 입을 열었다.
“검사해 봤는데 호르몬 분비가 이상해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최근에는 잠자리를 갖지 말래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었다. 잠자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결과지는 강아람이 중절 수술을 대비해 유도경을 속이려고 떼어준 것이었다.
가로등이 어두워 유도경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던 유하연은 손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누르던 손이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 돌린 유하연이 얼른 몸을 일으키고 헝클어진 옷을 정리하는데 손목이 다시 잡히고 말았다.
유도경이 음침한 표정으로 유하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들켰다고 생각해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간 유하연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유하연이 설명을 덧붙이며 설득력을 높이려는데 유도경이 유하연을 확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유하연이 그대로 유도경의 품에 쓰러지자 유도경이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원하는 게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가르쳐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