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0장
“호천산에서 가장 유명한 고적은 바로 춘양시대 정연 대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검못입니다. 천인석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원형 문 옆에 ‘호천 검못’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당대의 대서예가 안지춘의 아들 안균성이 쓴 것입니다.”
“또한 원형 동굴 안쪽의 벽에는 ‘풍류담운천’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연 나라의 4대 서예가 중 한 명인 염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절벽의 왼쪽에는 전서체로 ‘검못’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대서예가 김갑춘이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향토지에 따르면 이 검못 아래에는 정연 대왕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검못은 약 45미터의 넓이에 6미터 깊이로 물이 사시사철 마르지 않은 데다가 맑아서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인다고 해요. 게다가 깨끗해서 물을 길어 마실 수도 있습니다. 홍 나라 시인 이수경은 이 샘을 ‘천하의 다섯 번째 샘’으로 칭송했죠...”
가이드의 목소리가 이천후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검못에 대한 전설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너무도 신비했고 검못과 관련된 전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전설에 따르면 검못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검못의 물속에는 춘양시대 말기 정연 대왕이 소유한 수많은 보검들이 잠들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정연 대왕의 유해와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한다. 공훈이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정연 대왕의 무덤을 찾기 위해 수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염경에서 이곳 호천까지 와서 진영을 세우고 무덤을 발굴하려 했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천한전쟁 당시 천패왕 또한 검못의 전설을 어디선가 들었는지 이곳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검못으로 와서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공훈과 마찬가지로 정연 대왕의 검은 물론이고 무덤조차 찾지 못했다.
시후시대에는 손천도 정연 대왕의 무덤을 찾고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검못을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또한 윤나라 이군과 그의 동생 이민은 검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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