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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나는 서랍을 닫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가시죠.” 진료기록은 다시 받을 수 있었지만 송민주는 계속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아직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임다은은 기분이 좋았던 건지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쾌활했다. 또 다른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송민주 같았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빨리 걸었다. 바로 송민주를 데리고 병원으로 함께 가서 검사받고 싶었다. 계단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서자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임다은은 검은색 실크 롱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를 왼쪽 어깨까지 넘긴 채 정교하게 눈썹을 그리고 금방 핀 장미처럼 선명한 붉은 립스틱을 하고 있었다. 말하는 동안 눈썹과 눈은 한없이 구부러져 있었는데 평소 다가가기 어려웠던 모습과는 사뭇 상반됐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살구색 빈티지 레이스 스커트를 입고 검은 머리를 반쯤 걷어 올린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눈썹, 은테의 얇은 안경을 쓰고 입가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임다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녀는 연꽃에 더 가까웠는데 차갑고 고결한 모습이 그저 멀리서만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송민주가 이렇게 젊다니...’ 잠시 망설인 나는 내디딘 발을 도로 거둬들였다. ‘이렇게 젊은 의사가 정말 믿음직할까?’ 송민주가 눈치채고 위층을 바라보았다. 나를 본 송민주는 잠시 멈칫했다. 임다은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함께 나를 바라보다가 입가에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송민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환자분께서 오셨네.” 나는 계단에서 내려와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긴 하는데 진료기록은 있나요?” 송민주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내가 계단에서 내려올 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줄곧 나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의사의 시선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코웃음이 들려오자 임다은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민주는 유명한 신경과 전문의야. 평소에 그녀에게 진찰을 받고 싶어도 예약하기 힘들어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대수야. 같잖은 감기 진료기록을 꺼내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마.” 털털한 자세와 농담 섞인 조롱은 나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티났다. 익숙한 임다은의 태도에 나의 마음에는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천천히 조여졌다. 옷감을 움켜잡은 손은 이미 식은땀으로 적셔졌고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임다은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치자 나는 김현호가 한 짓을 그녀가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왜 날 봐? 민주가 대답 기다리잖아.” 임다은이 턱을 치켜올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야 정신이 든 내가 답했다. “송 선생님, 따로 가지고 있는 진료기록은 없습니다. 시간 나실 때 제가 병원에 가서 기록을 떼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송민주가 미간을 찌푸리고 임다은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나에 대한 불만이 숨겨져 있었는데 다만 임다은의 체면 때문에 직접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거실의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1초의 고요함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나는 김현호가 나의 진료기록을 숨겼다고 직접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말한다면 임다은이 나서서 두둔할 것을 알기에 굳이 쓸모없는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바도 아니었기에 나는 진료기록이 병원에 있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합당하지 않은 처사였다. 오늘 송민주를 만날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 미리 진료기록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나는 송민주가 임다은에 의해 오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송 선생님, 전에 핸드폰으로 찍은 건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나는 핸드폰을 꺼내 찍은 사진을 송민주에게 건넸다. 송민주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핸드폰을 받아 X-RAY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임다은은 송민주가 다 볼 때까지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민주야, 잘 봐봐. 워터마크가 있는지도 한번 확인해 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게 아니라 직접 찍은 사진이야. 위에 촬영 일시와 장소도 있어.” 나는 자신을 위해 변명했다. 송민주가 장소와 시간을 보고 입을 꼭 닫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말을 묵인했다. 핸드폰을 넘겨받은 임다은의 눈가에 의심이 스쳤다. 핸드폰에 표시된 시간과 장소는 내가 마지막으로 입원한 시간과 병원이었다. 나를 차갑게 보는 임다은의 눈가에도 흔들림이 일었다. “송 선생님, 지금 제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최대한 임다은을 외면하고 송민주의 답을 기다렸다. 나는 송민주가 임다은 앞에서 직접 상황을 말하길 원했다. 임다은이 나를 믿진 않지만 송민주는 믿을 것이었다. 임다은도 내가 그녀를 속인 것이 아니라 정말 뇌암에 걸린 것을 안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금의 죄책감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사진으로 보면 낙관적이지 않아요. 좌뇌 부분에 약간 그림자가 드리웠는데 종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원본 사진을 받으면 더 확실한 진단이 가능할 것 같네요.” 송민주는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안경을 들어 올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물론 이 사진이 실제 사진이라는 전제하에 내린 진단이에요.” 가벼운 말 한마디가 나에게 무겁게 닿았다. 그녀는 돌려서 임다은을 더 믿고 있고, 진료기록이 없는 나의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기력함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두 사람이 멱살을 잡으며 왜 나를 믿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정말 그들 앞에서 죽어야 나를 믿을 건가 싶었다. “송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진은 진짜니까요.” 복합적인 감정은 그저 형편없는 변명으로 끝맺었다. “네 거야?” 임다은이 물었다. 나는 답할 힘도 없이 침묵만 지켰다. 임다은이 나를 조금이라도 믿고 있었더라도, 그녀의 능력으로 내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조사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인식만 믿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도 내 탓이었다. 임다은의 옆에는 남자가 끊기질 않았다. 늘 주마등처럼 하나씩 바뀌었는데 나는 이미 나와 신경 쓰지 말자고 협의를 마쳤다. 임다은과 김현호의 이름이 연예면 헤드라인에 자주 오르내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위기감을 느껴 의사를 사서 임다은에게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당시 임다은과 나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내가 아프다는 말에 그녀는 와서 함께 있어 줬고,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도 보냈다.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 미희 아주머니는 아직 너희 집에서 일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한 갈비가 먹고 싶네? 해외에서는 음식이 맞지 않아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어. 아주머니가 한 갈비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 송민주가 가볍게 말을 돌리며 더 이상 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간절히 지켜보며 기회를 봐서 다음 약속을 잡고 싶었다. 송민주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이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송민주는 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임다은와 웃고 떠들며 말 붙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연히 미리 준비했지.” 임다은이 일어서며 송민주의 팔짱을 끼고 식당으로 향했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은 그렇게 삼켜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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