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내가 너무 순순히 굴어서 임다은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병실을 벗어났다.
김현호는 서둘러 따라나서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리를 들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어깨에서 힘이 느껴졌다.
김현호가 손으로 내 어깨를 누르며 다시 무릎을 꿇렸다.
무릎이 차갑고 딱딱한 바닥과 부딪히자 나는 신음을 흘리며 김현호를 올려다보았다.
“승호 형은 정말 살고 싶으셨나 봐요.”
김현호가 위에서 나를 하찮게 내려다보았다.
“다만 형과 같은 상황에서 계속 살아간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내 삶의 의미를 네가 찾을 필요는 없어.”
나는 김현호의 손목을 잡고 힘껏 뿌리쳤다.
움직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두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침대 프레임에 부딪히며 귀를 울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김현호를 이렇게 쉽게 밀어버린다고?’
나는 의심스러워하며 몸을 일으키고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똑바로 세우는 김현호를 바라보았다.
“배승호, 기분 나쁘면 나한테 뭐라고 해.”
임다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누나, 승호 형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김현호가 조심스럽게 해명하며 임다은 곁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손목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내가 방금 임다은이 없는 틈을 타서 그를 괴롭힌 것 같았다.
“방금 내가 똑똑히 봤어. 승호를 위해 감출 필요는 없어.”
차가운 시선의 임다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맴돌았다.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린 나는 변명하기도 귀찮았다.
임다은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김현호의 속셈을 알아챘다.
총애를 다투는 저급한 수단이었지만 임다은에게는 굉장히 유용한 수단이기도 했다.
똑똑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임다은도 손쉽게 김현호의 잔꾀들을 꿰뚫어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굳이 들춰내지 않고 그를 좋아하기에 그의 뜻대로 할 때가 많았다.
김현호를 좋아하기에 임다은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김현호를 내버려두었고, 나를 좋아하지 않기에 내 억울함을 몇 번이고 무시하고 있었다.
“너 안과도 한번 가봐야겠다.”
눈을 크게 뜬 임다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
임다은의 옆을 지날 때,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일단 같이 봉합하러 가자. 혼자 뛰어다니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
발걸음을 멈춘 나는 임다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평온했던 마음에 다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다은이가... 지금 날 생각해 주는 건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임다은이 손을 떼고 눈을 피하며 세련되고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 당신의 비참한 모습이 언론에 비치게 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도 않고.”
‘그렇구나...’
살짝 열리려고 했던 마음은 그녀의 말에 다시 쾅 닫혔다.
나는 묻고 싶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생활로 인해 오르내렸지만 언제 이렇게 신경 쓴 적 있었는지.
말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나는 다시 삼켰다.
이리저리 늘여놓아도 입만 아플 뿐, 쓸데없는 대화일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임다은을 따라 상처를 치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혼자 진료실로 들어가 상처를 처리하고 나온 나는 임다은과 김현호가 창가에 서서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창문을 마주한 채 서 있는 두 사람은 내가 나왔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밖의 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며 바닥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여자는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고 남자는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가끔 남자가 고개를 숙여 여자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은 눈꼴셨다.
그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임다은이 평평한 아랫배에 손을 얹고 온화하고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현호와 아이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했다.
아이가 임다은을 닮았을지, 김현호를 닮았을지, 아이의 태명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떤 이름을 지을지, 이것들은 전부 나와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세상이 빛도 보지 못한 딸, 꼬물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너무 작아서 눈을 뜨고 세상을 볼 겨를도 없이 꼬물이는 차가운 땅속에 누워 있었다.
어쩌면 꼬물이가 엄마가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나기로 했을지도 몰랐다.
임다은이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몸을 돌려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나를 향해 걸어왔다.
“집으로 가자.”
기사가 우리를 데리고 임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낯익은 별장이었지만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는 더 이상 내 방이 없었다. 임다은의 합법적인 남편이었지만 이방인처럼 보였다.
집사도 나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나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 방이나 준비해 주세요.”
나는 이미 이곳을 근거지로 여겼고 나 자신을 여행객으로 생각하며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던 나는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눈을 뜰 수 없었다.
코에서 익숙한 디퓨저 향이 맴돌았다. 마치 임다은과의 신혼 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소녀는 잠옷 자락을 잡고 방문 앞에 서서 하얗고 작은 뺨에 홍조를 띤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고집 세고 굴욕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를 발견하자 그녀는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입을 열었다.
“몸은 얻어도 내 마음은 얻지 못할 거야.”
“강요하지 않을 거야.”
나는 말하며 옆방을 가리켰다.
“나는 오늘 밤 저쪽에서 잘 거야.”
임다은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넋을 잃은 채 나를 바라봤다.
“신혼 첫날에 신부를 내버려두는 게 어디 있어?”
“신혼 첫날 밤에 신랑한테 몸은 얻어도 마음은 얻지 못한다고 말하는 신부도 없지.”
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고 말했다.
“잘 자.”
당시 나는 함께 지내면서 임다은의 마음을 천천히 열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틀린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정성을 들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고 임다은에게 나는 그저 나쁜 마음을 품은 남자였고 나에게 임다은은 영원히 데워지지 않는 차가운 얼음이었다.
꿈속 장면이 바뀌며 어느덧 한성 그룹이 파산되는 순간 임다은이 회의실 문을 열고 직원들을 데리고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이 캄캄하고 호흡이 가빠진 나는 한참 진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밖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희미하게 차 소리가 들렸고 말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전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집사가 와서 방문을 노크하며 문밖에서 말했다.
“승호 님, 아가씨 친구가 오셔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몸을 일으키자 두통이 심해진 나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답했다.
“몸이 좋지 않은데 안 가도 될까요?”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승호 님이 만나고 싶어 하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송민주였다.
임다은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진실을 들춰내려는 것 같았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서랍을 열고 멈칫했다.
넣어뒀던 진료기록과 엑스레이가 사라졌었다.
“오늘 오후 누가 제 방에 왔었나요?”
나는 재빨리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가 솔직하게 말했다.
“김현호 님께서 과일을 가져다주러 한 번 온 적 있습니다.”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김현호는 송민주가 내 진료기록만 봐도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임다은에게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기척이 없자 집사가 재촉했다.
“승호 님, 아가씨께서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