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나희정에게 치료를 맡기는데 동의하다
박서진은 이다은이 점차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다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 닥터 제니가 정말 박선재의 재진료를 거부한다면 박선재에게 수술을 해줄 수 있는 다른 의사를 찾는 수밖에 없다.
닥터 제니는 보존적 치료를 진행하며 한약을 마시고 침을 맞아야 한다고 말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한약을 먹고 어떤 침을 맞아야 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의사를 찾는다면 보존적 치료는 포기해야 한다.
“서진아.”
이때 갑자기 나타난 박시연이 손을 벌리며 박서진의 앞을 막아섰다. 전에 박서진이 급히 자리를 떠난 것은 박시연을 데리러 가기 위해서였다.
“네 할아버지가 이곳을 떠나 오성시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어. 오성시에 할아버지의 의동생이 누굴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박시연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관리가 잘되어 있었는데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정교한 메이크업에 맞춤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온몸에서 귀티가 흘렀다.
박시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부잣집 아가씨의 고귀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박서진을 항상 온화한 태도로 대했고 박서진도 박시연을 존경했다.
“네. 할아버지가 여기서 치료받지 않겠다고 임 대표를 불러갔어요. 주치의를 바꿔서 치료받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으셨고요. 고모는 백영사에서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텐데 우선 호텔로 가서 쉬어요! 할아버지 곁에는 제가 있을게요.”
“괜찮아.”
박시연은 옅게 웃었다.
“같이 할아버지를 만나 뵈러 가자! 나이가 드시니까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라니까. 뭣보다 몇 년 동안 네가 할아버지 보살피느라 수고했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에요.”
박서진은 박시연과 박선재의 건강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닥터 제니가 박선재의 진료를 맡지 않고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박시연은 곧바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전에 병원장 부인이 데려온 여의사는 어떠니? 들어보니까 경력도 훌륭하던데, 한 번 맡겨보는 게 어때?”
박서진은 임수빈에게 나희정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나희정이 닥터 제니를 사칭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부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나희정이 처음부터 닥터 제니를 사칭했다는 점에서 인품이 좋지 않았다.
박서진은 인품이 좋지 않은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박서진이 아무 말 없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본 박시연은 그가 나희정에게 치료를 맡기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진아, 나희정이라는 사람이 닥터 제니를 사칭한 건 확실히 잘못했지만 우리도 당장 다른 의사를 찾을 수가 없잖아. 안 그래?”
박시연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고모는 닥터 제니라는 사람이 너무 오만한 것 같아. 전에 네가 한 행동이 닥터 제니에게 미움을 산 것도 있고 만약 닥터 제니가 불만을 품고 네 할아버지 병을 치료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수작을 부릴 수도 있잖아. 그때가 돼서 네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후회해도 늦어.”
박시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한동안 고민하던 박서진은 천천히 탁한 숨을 내뱉었다.
“고모, 제가 다른 의사를 좀 더 찾아볼게요.”
박서진은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명확하게 거절도 하지 않았다. 닥터 제니 같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의사는 찾기 어렵지만 나희정 같은 의사는 한 트럭을 찾아올 수 있었다.
“그래. 나도 경험이 많은 한의사들을 수소문해서 데려올게.”
“네.”
박시연과 박서진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VIP 병실로 향했다.
박선재는 이미 VIP 병실을 떠났고 나희정이 초조한 마음으로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박서진과 박시연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박서진 씨, 박시연 씨.”
박시연은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 미혼이다. 부처님을 믿는 박시연은 젊은 시절부터 평생 결혼하지 않고 불당에서 지내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희정은 박시연을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 않고 공손하게 이름을 불렀다.
“박서진 씨, 저는 심장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적이 많고 해외에 있는 저희 지도 교수님도 유명한 심장 전문의에요. 귀국하기 전에 어르신의 모든 상황을 지도 교수님에게 자세히 설명해 드렸고 저희 지도 교수님께서 성수로 와서 어르신의 수술을 집도해 주겠다고 했어요.”
나희정은 손가락을 배배 꼬며 조심스럽게 박서진의 안색을 살폈다. 박시연은 나희정을 불러온 장본인이니 당연히 나희정의 편에서 말을 해줄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박서진의 태도이다.
“저는 심장 수술 경험이 풍부하고 어르신의 병에 대해서도 여기 오기 전에 여러 번 반복해서 연구했어요. 정말 자신 있어요.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박서진은 흘낏 나희정을 쳐다보았다. 눈앞의 나희정은 몸매를 드러내는 오피스룩에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어 박선재의 말처럼 전혀 의사로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건 나희정 씨의 지도 교수가 오면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일단 나희정 씨를 남겨두자. 서진아,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박시연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박서진을 쳐다보았다.
박서진은 잠시 고민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일단 이 방법도 보류해 두는 걸로 해요.”
“네, 감사합니다. 제가 꼭 어르신의 병을 치료해 드릴게요.”
나희정은 기쁨에 겨워 대답했다. 이곳에 남을 수만 있다면 박서진에게 접근할 핑계와 이유는 많았다.
박시연의 말에 의하면 박서진에게는 약혼녀가 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다.
나희정이 노력해 박서진의 마음을 얻고 배후에서 박시연이 암묵적으로 나희정을 밀어준다면 그녀는 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수 있다.
결연하게 맹세하는 나희정을 무심하게 쳐다본 박서진은 곧이어 뒤돌아 박선재를 찾으러 갔다.
한편, 박선재는 임수빈과 함께 청주 사립병원을 떠나 보경시의 가장 큰 백화점으로 향했다.
“임 비서, 여자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나?”
박선재는 발길이 닿는 대로 쇼핑을 하며 임수빈에게 물었다.
“수지한테 우리 집에 와서 지내라고 말 해놓고 혼자 별장에 남겨 둔 채 다들 외출을 했으니, 별장에 집사나 가정부가 있다고 해도 얼마나 서럽겠어. 내가 수지를 아끼는 마음이 잘 느껴지도록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사서 가져다줘야겠어.”
“어르신, 저쪽에 있는 사람 수지 씨 같은데요?”
임수빈은 멀지 않은 곳에 검은색 바람막이와 운동복 바지, 하얀 운동화에 가방을 멘 수지를 보며 확실하지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응? 어디?”
박선재는 임수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고 곧이어 수지를 발견했다.
“정말 수지네! 수지야.”
박선재의 목소리를 들은 수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고 이내 기쁜 기색이 역력한 박선재를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우연적인 상황에 수지는 할 말을 잃었다. 박씨 가문의 사람들을 피해 박선재가 오성시에 돌아오면 몰래 치료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가 이곳에 나타날 줄 몰랐다.
그러나 이미 서로 마주친 상황에서 수지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박선재를 향해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갔다.
박선재와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수지는 이다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다은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사부님, 박서진 씨와 박시연 씨가 나희정이 어르신의 병을 치료하는 걸 동의했어요.”